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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연희동의 밤

- 나는 나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대꾸했다. 아마도 내 마음 속에선 그보단 아름다운 노래이기 때문이겠지. 뭐든 그렇잖아. 마음속에서 꺼내어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순간 갑자기 초라해 보이잖아. 분명히 그보단 아름다웠는데. 그래서 나는 사람들 앞에 소중한 걸 꺼내놓지 않아. 언니는 그게 좋은 건 아니라고 하더니, 내게 마음을 좀 열고 살라고 했다. 나는 언니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나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종종 서로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마음이 서로를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를 보살피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게 신기했다. 언니는 알코올램프를 살짝 살짝 흔들며 심지에 붙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가끔 드라마 속 인물이 부러워. 모두가 기억해주는 삶을 살잖아. 가짜인..

Review 2023.11.19

책 / 미조의 시대

- 낙성대역 인근 전셋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얼추 맞았고, 위치도 좋았다. 물론 반지하였지만. 언니 말대로 5천만 원으론 지상의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곁에서 함께 부동산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엄마는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제 빨래를 어떻게 말린다니. 엄마는 빨래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고작 빨래 문제만 걱정하는 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빨래방 가서 건조기로 말리면 되니까 걱정 마. 어딜 가든 살아. 다 마찬가지야. 나는 수영 언니나 할 법한 말을 엄마에게 해주었다. - 중증 우울증 판정을 받았을 때 엄마에게 노트북을 가져다주며 뭐든 써보라고 했다.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다독이는 습관이 있었기에 엄마도 그렇게 해보길 바라서였다. 그러나 엄마는 긴 글은 쓰기 싫어했고, 단상 같은 것을 기록하..

Review 2023.11.13

넷플릭스 / 서부전선이상없다

국가 혹은 전체를 위한다는 대의를 명분으로 개체를 무시하는 데서 비극은 일어난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과연 값진 일인가? 그 어떤 희생에도 당의성이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게 그냥 살인이고 자살일 뿐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과연 국가는 개인을 보호하고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물론 국가의 순기능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다른 시스템적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국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스스로를 살찌우고 융성하기 위해 타자와 심지어는 국가 내부의 개체들까지 파괴한다. 그리고 공권력을 쥔 사람들은 대개 선의가 아닌 사익을 위해 국가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 전쟁은 결코 단순한 오락이나 자극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엔터테인먼트 상품..

Review 2023.11.13

책 / 기억의 뇌과학

Part 1. 기억의 과학 - 어떤 기억이건 생성되려면 반드시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쇼핑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주차 구역이 어디인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나중에 차를 찾느라 애를 먹겠지만 이것은 주차한 위치를 잊어서가 아니다. 이 경우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주차 위치에 대한 기억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 “그 초여름 밤 생각나? 굴이랑 스모어를 먹으면서 레이디 가가의 노래를 들었잖아. 애들이 해변에서 축구를 했는데 막내 수지가 해파리에 쏘였었지”라는 기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각각의 경험에 대응해 서로 무관하게 일어나던 신경 활동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후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구조가 변화하면서 이 패턴은 지속성을..

Review 2023.10.24

책 / 아가씨 유정도 하지

‘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건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요.’ 이것은 내가 육 년 전 뉴욕 여행에 갖고 갔었던 책의 한 구절이다. 그 책에서 왜 이 부분이 적힌 페이지를 접어놓았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행이란 죽음의 예행연습이라는 어머니의 말은 잊히지 않는다. 그 여행 내내 어머니는 검은색 수첩을 갖고 다녔고 그 안에는 빛바랜 내 신춘문예 당선 기사가 간직돼 있었다. 코니아일랜드에 함께 갔던 여성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 수첩은 이제 내가 갖게 되었다. 이따금 나의 가..

Review 2023.10.18

책 /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 자전거의 가격이나 사양, 무엇보다 마이크가 거기에 들인 정성에 대해서는 민영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이크는 무엇이든 원하는 걸 갖기까지 신중하고 가진 다음부터는 소중히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실감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해야 할 때 편하다는 이유로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을 전가하는 건 안이하고 옹졸한 태도였다. - 내세울 만한 스펙이 별로 없는 승아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글솜씨로 곧잘 자신을 포장하곤 했다. 그녀가 내세우는 장점은 주로 성실성과 적응력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있다고 강조하는 건 원하는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이기 십상이다. 승아가 생각할 때 그것은 도전 정신과 창의력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할 수 있어!라고 하기..

Review 2023.10.17

23.10.05

그냥 팔자주름이 보기 싫었을 뿐인데. 피부 탄력을 위해 돈만 있으면 많이 받을수록 좋다는 피부과 의사들의 유투브 영상을 보고, 턱라인까지 같이 받으면 좋을 것 같다는 클리닉 실장의 얘기에 넘어가 써마지와 함께 울쎄라 시술을 받았다. 사실 작년에 이미 울쎄라 600샷을 받았었고 그 때도 피부 가죽이 근육과 분리되어 너덜거리는 느낌은 있었지만 해골 증상은 나타나지 않았으며, 시술 이후 1년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런데 시술 바로 다음 날부터 얼굴이 해골형이 되었다. 턱과 골격 부각이 더 심해져 얼굴이 네모나고 울퉁불퉁해졌다. 눈두덩이와 양볼은 퀭해지고 앞볼이 판판해지고 얼굴에 자잘한 주름이 생겼다. 속건조가 생겨서 얼굴이 땡기고 관자놀이까지 피부가 흐물거린다. 울쎄라의 원리는 피하지방층과 근육층 사이 ..

Diary 2023.10.05

책 /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 삼촌은 원래가 호탕한 성격이라 말투도 행동도 거침이 없어 때로는 적을 만들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사랑이 참 많았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오빠들은 어머니가 계셨다. 삼촌은 부모가 없었으니 마음 기댈 곳도 없었으리라. 부모 없이 형수 손에 자란 삼촌은 막내임에도 집안 대소사에 앞장섰다. 심성이 곧고 사랑이 많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시선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생각에 올바르다고 여기면 그에 충실히 따랐다. 나는 안다, 결핍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성장시키기도 한다는 걸. -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어머니, 저 막둥이 순자에요. 그곳에서 평안하신지요? 내일이 추석이라 그런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젯밤 꿈에 어머니를 뵈었어요. 어린 제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걸어가시다 엄지만 한 ..

Review 2023.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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