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84

책 / 이 지랄맞음이 쌓여 축제가 되겠지

- 진정한 복수는 모욕을 주는 것도 용서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를 동정하는 것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 타이베이로의 출발, 그것은 왜 우리끼리는 안 되냐는 반항심에서 시작된 여행이었다. 글에 남기지는 않았지만 더 많은 거절과 더 많은 모욕과 조롱이 우리를 따라다녔다. 그럼에도 나는 다음 여행을 준비한다. 행복은 바라는 대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노력과 의지로 맺는 열매 같은 것이라는 걸 나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 조승리 에세이, 중에서

Review 2024.10.06

책 / 엄살원

‘생추어리’란 기존의 착취적인 환경에서 고통받던 동물이 온전한 모습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인간과 비인간동물이 함께 노력하는 공간이다. 국내 최초의 생추어리, 새벽이생추어리에는 살아남은 돼지 ‘새벽이’와 ‘잔디’가 산다. 그들은 누구의 반려동물도 아니고 상품도 아닌 돼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여러분은 지금 동물들의 안식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이 주인이고 여러분이 방문객임을 잊지 말아주세요.” 새벽이생추어리 입구에 적힌 안내 문구다. 새벽이는 태어나자마자 인간에 의해 꼬리와 송곳니를 제거당했다. 새벽이가 자라날 곳은 돼지라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게 되는 환경이니 물어뜯을 수 있는 힘도 물어뜯기게 될 부위도 미리 없애버린 것이다. 태어난 그 다음다음 날에는 생..

Review 2024.09.22

책 / 자기만의 공간

- 여행에서의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린 뒤로 나는 매일 밤 나를 위해 집 안을 정돈하는 시간을 가진다. 호텔의 턴다운 서비스처럼, 잠깐씩이라도 간단하고 사소한 서비스를 나에게 베푸는 것이다. 이 과정은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시작된다. 무심결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영수증을 치우는 것. 의자 등받이가 짊어지고 있는 하루치 옷더미를 정리하는 것. 침대 위엔 두어 번 팡팡 두드린 베개와 반듯하게 펼친 이불만 남겨 둔다. 턴다운에는 북북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청소기질, 구석구석 힘주어 문지르고 물을 튀기는 설거지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세탁기 탈수가 끝나기까지 쏟아지는 졸음과 다툴 필요도 없다. 휴식을 해치지 않는, 빠르고 간단한 정돈이면 충분하다. 조용하고 힘들지 않은 과정이다. 낮의 시간을 돌이키기엔 하..

Review 2024.09.19

책 / 다정한 건 오래 머무르고

-일요일부터 아팠다. 월요일은 어떻게 출근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아팠고 당연히 한 끼도 못 먹었다. 집에 올 때까지는 도착할 생각만 하느라 몰랐다가 씻고 나니까 갑자기 배가 고팠다. 엄마에게 전화로 솜이랑 산책하고 돌아오는 길에 피자빵 좀 사 오면 안 되냐고 물었다. 엄마가 애 데리고 시장에 들러야 해서 빵집 갈 시간이 없다면서 끓여놓은 김치찌개나 먹고 자라고 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텐데 전화 끊고 침대에 눕자마자 서운하고 서러워서 자꾸 눈물이 났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 같았다. 우리 엄마는 못됐다고, 피자빵도 안 사주는 못된 엄마라고 울면서 잤다. 다음 날 출근할 때 엄마가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는데도 못 들은 척하고 그냥 나왔다. 퇴근하고 집에 와서 또 잠이 들었다. 새벽..

Review 2024.09.18

책 / 아무튼, 현수동

-밤섬을 폭파했을 때 섬의 윗 부분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래 기반암은 남았다. 섬의 밑동은 그렇게 한강 수위가 내려가면 모습을 드러냈고 유량이 많아지면 수면 아래에 잠겼다. 그 주위에 토사가 쌓였다. 버드나무 씨앗이 싹을 틔웠고,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새들이 찾아왔다. 얼마 뒤에는 겨울철새가 쉬어 가는 곳이 되었다. 여름이면 섬 전체가 잠겼지만 겨울에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밤섬은 서서히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돌섬이 아닌, 띄엄띄엄 떨어진 모래섬이 되었다. 홍수에 강한 버드나무가 빽빽하고, 느릅나무, 억새, 갈풀이 덩굴을 이뤄 마치 정글 같은. 수면 위아래로 여러 종류의 나뭇가지와 푸이 드리워진 장소는 물고기들이 알을 낳기에 적합했다. 붕어, 잉어, 누치..

Review 2024.09.13

책 / 일하는 마음

-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은 어쩌면 ‘애쓰기’로 인도하는, 잘못 끼운 첫 단추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어떻게 배워야 할까요?”와는 분명히 다른 질문이다. 핵심은 ‘나’의 ‘성장’이 아니라 내 눈앞의 과업(무엇)과 그것을 해내는 방법(어떻게)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발 한 발을 제대로 올바르게 내디딜 수 있어야만 부상 없이 잘 달리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 나의 지성이 집중해야 할 지점은 한 발을 잘 내딛는 것이다. 성장은 한 발들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가닿을 수 없는 결과물이다. 성장은 과정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결과이고, 잘 수행된 과정은 세상이 성공이라고 정의하는 결과를 담보하지는 못해도 성장만은 가져다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수행의 과정에 지적으로 ..

Review 2024.07.30

책 / 아무튼, 피트니스

-‘운동해도 소용없대. 굶어야 빠진대.’주변에서 늘 속삭이는 말이다. 인터넷에 넘실거리는 뉴스에 주변 경험담을 얹어서는 자기는 해보진 않았어도 진리처럼 여기는 확신에서들 그런 충고를 한다. 해보니까, 최선을 다해 잘 먹는 것이 다이어트다. 쫓기는 시간, 아쉬운 주머니는 늘 대충 끼니를 때우라고 강요한다. 잘 먹기 위해 챙기는 시간을 아까워한다. 대신 화끈한 특식으로 보상하며 스스로 합리화한다. 먹는 것은 취향이고 습관이고 역량이다. 잘 챙겨서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 나는 ‘먹지 말아야 한다’가 아니라 ‘잘 먹자’를 전략으로 택했다.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아틀라스처럼 일로 힘을 쓰는 것만이 아니라, 헤라클레스처럼 쓰는 힘도 필요하다. 일이 아닌 데다 에너지를 들이는 것,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흔..

Review 2024.07.28

책 / 벤자민 그레이엄의 현명한 투자자

투자에 성공하려면 먼저 성장성이 높은 산업을 선택한 다음 그 산업에서 가장 유망한 종목을 선정하라고 흔히 말한다. 예를 들면 먼저 컴퓨터 산업을 선택하고 그중에서 IBM을 선정하는 식이다. 그러나 1949년 1판 서문에서 예로 들었듯이, 항공운송 업종의 전망은 매우 밝았지만 개별 종목들의 실적은 매우 부진했다. 그리고 컴퓨터 산업에서 IBM은 실적이 매우 좋았지만 다른 종목들은 실적이 부진했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1.성장 전망이 밝다고 해서 투자수익이 보장되지 않는다.2.전문가들도 유망 산업에서 유망 기업을 찾아내기는 어렵다.또 투자자를 곤경에 빠뜨리는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이다. 이성을 잃고 시장에 휩쓸리기 쉽기 때문이다. 투자할 때는 항상 건전한 사고방식을 유지해야 한다...

Review 2024.07.27

녹나무의 파수꾼을 읽고

김민철 작가의 에세이를 읽고 '80세의 나'를 상상하고 구체화하고 그 방향으로 닻을 잡고 항해하는 삶이란 얼마나 멋지겠는가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막상 '80세의 나'를 구체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왠만하면 어느 정도 재산을 비축해 뒀으면 좋겠고, 내가 좋아하는 곳에 걸어가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체력과 위장 건강이 뒷받침되어 있으면 좋겠고... 그런데 이런 놀고 먹는 것 외에 80세의 내가 어떤 '일'을 하며 살아가기를 원하는가에 대해서는 상상을 이어나가기가 어렵다. 80세의 나는 아마 회사를 다니기는 무리일 거다. 그럼 프리랜서로서 나의 장기를 활용할 수 있는 일, 혹은 나의 자아 실현과 즐거움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그 때의 나는 어떤 일을 해야 행복할까? 그런 생각을 하..

Review 2024.07.21

책 / 내가 본 것을 당신도 본 것처럼

엄마는 느렸다. 굉장히 느렸다. 평범한 사람의 걸음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느렸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느리게 걸어도 엄마보다 한참 앞서갔다. 거기다 태국의 보도는 성인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엔 턱없이 좁았고, 보도블록이 깨진 곳도 심심찮게 있었다. 엄마는 조금이라도 울퉁불퉁한 길을 만나면 중심을 잃고 휘청이기 일쑤였다. 지갑이며 마스크며 핸드폰 같은 걸 두고 와서 기껏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일도 잦았다. 나는 위험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뒤를 돌아 길을 조심하라고 알려주었다. 앞서서 길을 찾으며 그 어려운 걸음으로 가는 길이 헛걸음이 되지 않도록 확인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보다 앞서 걸었고 때로는 한참 멀어진 지점에 서서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정말 답답한 일이었지만, 묵묵히 그녀가 오기를..

Review 2024.07.17

책 / 만화로 보는 '21세기 자본'

주요 내용 ‘자본 수익률 (r) ’ > ‘경제 성장률 (g) ’이라는 논리는 이론이 아니라 역사가 보여 주는 사실이다. 과거에 축적된 부는 노동으로 얻은 부보다 성장이 빠르다는 의미이다. 피케티가 자본주의의 제 1 기본법칙으로 제시한 것은「α = r×β」라고 하는 수식이다. ‘α’는 ‘자본소득 분배율’이고, 총 소득에서 자본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을 나타낸 것이다. ‘총 소득 = 자본소득 + 노동소득’이기 때문에 자본소득의 비율이 높아지면 그만큼 노동소득의 비율은 감소한다. ‘β’는 ‘자본/소득 비율’이다. 자본이 몇 년치 소득에 해당하는 규모인지를 의미하는 지표로 축적된 ‘경제의 규모감’을 파악할 수 있는 역할을 한다. ‘β’가 600%라면 그 자본은 소득의 6년분이 축적되어 있는 셈이다. 「α = r×..

Review 2024.07.15

책 / 혼란스러운 가부장

-“우리 집사람은 있잖아. 내가 설거지만 하면 잔소리야.”    “왜?”   “그렇게 하는 게 아니래. 자꾸 더 깨끗하게 하래잖아.”    “제수씨가 깐깐하네.”    “깐깐한 게 아니라 화풀이 같애. 나만 갖고 난리야. 집안일을 도와줘도 뭐라 그런다니까. 내가 어떻게 도와줄 맛이 나겠어.”    상명이의 짜증을 잠자코 듣던 웅이가 살짝 끼어든다.    “너 약간 그런 스타일이냐? 설거지 다 해놨는데 그릇에 고춧가루 묻어 있는 타입?”    상명이가 어물쩍 넘어간다.    “꼭 그런 건 아니고…… 암튼 집사람이랑은 뭔 일을 같이 못 하겠어.”    웅이는 덧붙이고 싶다. 설거지는 아주 뽀드득뽀드득 소리 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양념이나 기름기 같은 게 남아 있지 않도록 말이다. 그 부분은 웅이에게 사소한..

Review 2024.07.14

책 / 남의 찌찌에 상관 마

생방송 시작까지 삼십 분이 남았다. 리허설이 시작된다고 한다. 세트장을 향해 걷는다. 남자 MC가 진행자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네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에 앉는다. 슬아의 자리는 소설가와 영화감독 사이다. 세트장 소파 중앙에 앉아 핀마이크를 건네받는다. 슬아의 마이크 착용을 돕던 여자 스태프가 멈칫한다.“왜 그러시죠?”슬아가 묻자 스태프는 당황한 기색으로 “잠시만요” 하고 사라진다.소설가와 영화감독은 문제없이 마이크 착용을 마친 듯하다. 슬아는 마이크가 오기를 기다린다. 사라진 스태프는 세트장 구석에서 몇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표정이 굳은 걸 보니 심각한 사안으로 보인다.    대기실에서 만났던 섭외 담당 작가가 다시 나타난다. 그는 여자다. 여자로서 은밀히 조언하듯이 슬아에게..

Review 2024.07.14

책 / 어떤 시국 선언

돼지는 나를 비건 지향인으로 만든 결정적인 동물이다. 구제역과 아프리카돼지열병으로 어마어마하게 살처분된 종이기도 하다. 용기를 내어 살처분 현장 영상을 찾아보았을 때 한 명의 돼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얼굴에 서린 불안과 공포와 고통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같은 자리에 있었다면 나 역시 똑같은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얼굴을 마주한 순간 돼지와 나 사이의 무수한 공통점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러자 더 이상 돼지를 먹을 수 없었다. 돼지를 고기라고 부를 때마다 목에 뭔가가 턱턱 걸리는 것 같았다.내가 돼지에 대해 쓸 수 있는 말들은 거의 동사뿐이었다. 그의 마음의 풍경에 관해서는 도저히 쓸 수 없었다. 무슨 말을 가져다 붙여도 모자랄 것 같았다. 공장식 축산 현장에서 돼지가 통과하는 이동 동선에 대해서만 ..

Review 2024.07.12

책 / 우리 사랑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하지 않으리

장덕준 씨는 쿠팡 칠곡 물류센터에서 물류 작업을 하는 이십대 노동자였다. 그는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여동생에게 줄 간식을 사곤 했다. 마지막 퇴근길에는 웨하스를 샀다. 웨하스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탄 그의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훗날 그의 가족들은 몇 번이고 돌려보게 된다.        그는 쿠팡에서 일한 지 1년 4개월 만에 과로사했다. 과로사의 대표적인 유형인 급성심근경색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그의 근무시간은 주당 평균 62시간 10분이었다. 그는 하루 평균 5킬로그램씩 100개, 30킬로그램씩 40개의 택배 상자를 날랐다. 일터에서의 걸음 수는 하루 평균 5만 보였다. 1년 사이 체중이 15킬로그램가량 빠졌다. 그는 2020년 10월 12일 새벽 6시, 야간 근무를 마치고 귀가한 직후에 죽었다..

Review 2024.07.12

책 /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여행은 일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꿈꾸는 그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지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곳에서도, 그때,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매일 먹는 바게트가 지겨울 테고, 대화할 상대가 없는 일상의 외로움에 몸서리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땐 그것이 또,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의무는, 지금, 이곳이다. 내 일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이 일상을 무화(無化)시켜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의무이다.-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것,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항상 깨어 있는 것,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부단한 성실성으로 순간순간에 임하는 것,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 오직 지금만을 살아가는 것..

Review 2024.07.02

책 / 비극이 알려준 긍정의 태도

모든 자책과 원망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차츰 이성의 끈을 붙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어떤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구하기 위해 그 구절이 나에게 온 것이다. 나의 어처구니없는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 구절이 나에게 도착한 것이다.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그렇다.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다. 아무리 원망을 하고 있어봤자 바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나의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오직 바꿀 수 있..

Review 2024.07.01

영화 / 인사이드아웃2

1사춘기에 들어선 라일리에게 새로 생기는 감정들: Anxiety, Envy, Boredom, Embarrassment. 일꾼들이 우르르 몰려와 감정 통제 본부를 때려 부수고 리모델링하는 부분은 사춘기의 감정 소용돌이를 아주 섬세하고 놀랍게 표현했다. 물론 이 영화 속의 다른 장면들에도 하나 하나 곱씹어 볼 수 있는 여지들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예컨대 영화 마지막에 불안이가 예측 불가한 미래를 상상하며 불안해하자 시험 공부 같은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불안이를 집중하게 만드는 것도 탁월한 장면이었다.2나는 항상 내 모든 성취에 있어서 최고의 동력은 불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부분을 영화가 (우려하거나 지양하는 대신) 사랑스럽게 표현해 주어서 고마웠다. 불안도 결국 내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

Review 2024.06.29

책 / 9번의 일

- 지팡이를 비스듬히 껴안은 채 휠체어에 기대어 앉은 장인은 말이 없었다. 언뜻 보면 잠이 든 것처럼 보였고 그 순간 그는 장인에게 쓸 만한 영정 사진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후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듯 스스로를 꾸짖으며 역사를 빠져나와 주차장까지 갔다. 그는 장인을 들어 올리다시피 해서 뒷좌석에 태우고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넣었다. 불편해 보이는 장인의 자세를 여러 번 고쳐주고, 장모가 옆자리에 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자 이마와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그는 시동을 걸기 전 운전대를 잡은 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소한 행동이 장인 내외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차들로 몹시 붐비는 구간을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장모가 말했다. 우리 때문에 자네가 고생..

Review 2024.06.19

책 / 40일 간의 남미 일주

- 가능하면 긍정적인 면만 볼 것.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염려와 두려움을 지울 것. 그리고 친절하게 웃을 것. 삼십 분 전에 주문한 전통 샌드위치가 이제 나왔다. 삼십 분을 조리한 것 치곤, 대체 어디에 공을 들였나 싶을 만큼 식빵 안에 햄과 치즈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시간이 생명인 서울역의 던킨도너츠에서는 1분 만에 나오는 것이지만, 나는 다시 이 현상의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했다. 덕분에 기다리는 삼십 분 동안, 나는 이 글을 다 쓸 수 있었다. 멕시코는 나를 진정 작가로 거듭나게 하는 곳이고, 이곳에서 나는 긍정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지도 모른다. - 내 가방 속에 있는 유산균 가루가 마약으로만 의심받지 않는다면, 그래서 멕시코시티 국제공항에서 억류된 채 ‘한국의 소설가, 카르텔의 마약 운..

Review 2024.05.27

책 /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여행자의 눈에, 집 안팎을 공들여 가꾸는 코르도바 사람들의 손길은 그저 감탄스러웠다. 그들은 마치 꽃에게 그러하듯 매일의 일상을 정성껏 돌볼 것 같았다. 오늘 하루를 시들게 두지 않으려는 사람들. 물을 주고 마른 잎을 떼어내며 오늘을 돌보는 사람들. 집 안에 하늘을 들이고 꽃밭을 가꾸는 마음이라면, 내가 모르는 삶에 대한 어떤 대답을 알고 있을 것도 같았다. 그 답을 들으려, 그 시절 나는 발 아프도록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안다. 사실은 ‘꽃의 거리’까지 가지 않아도 있다는 걸.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일상을 가꾸는 사람들이. 옛날 주택 대문 위의 좁다란 화단에 삐죽삐죽 자라는 대파를 심어둔 아주머니, 스티로폼 박스에서 키워낸 방울토마토 세 그루가 자랑인 아저씨, 고무 대야 ..

Review 2024.05.17

책 / 좋은 곳에서 만나요

희재와 엄마 가운데로 고개를 내밀었다. 넘실거리며 끝없이 흐르는 넓은 강 위로 초여름의 부드러운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테두리를 둘러 띄워놓은 부표마다 갈매기들이 하나씩 앉아 몸을 부풀렸다. 이제 막 푸르러지기 시작한 강변의 나무들과 강 건너에 선 크고 작은 건물들, 멀리 다리 위를 지나는 차들까지 이미 수백수천 번을 본 풍경이지만 특별하게 새롭고 아름다웠다. 저기 좀 봐, 멋있지. 나는 희재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말하고 나니 그제야 예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 이유리, 중에서

Review 2024.05.17

책 / 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종종 나는 사람들에게 60대의 자신의 모습을 딱 한 장면으로 묘사해보라고 말한다. 시선을 멀리, 더 멀리 두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당신이 가장 도착하고 싶은 60대의 한 순간을. 이 상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내가 있는 장소, 그곳의 분위기, 같이 있는 사람, 눈앞에 펼쳐진 풍경, 그때 내가 하고 있는 행동까지 최대한 자세하게 상상해보자. 멀리 떠 있는 풍선 같은 꿈이 아니라, 내 손에 쏙 들어오는 조약돌 같은 단단한 꿈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당신도 이 질문에 답해보길 바란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잠깐 이 책을 떠나도 좋다.나부터 내가 꿈꾸는 60대를 한번 설명해볼까? 커다란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이 테이블은 20대부터 내가 계속 쓰고 있는 바로 그 원목 테이블이다. 20대부터 평생..

Review 2024.04.18

책 /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효율적으로 먹기 :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 [ 3차원 절식 1단계 ] 빠르고 해로운 탄수화물을 걷어내라 노화 속도 제어를 위한 3차원 절식의 첫 번째는 단순당(설탕, 꿀, 사탕, 초콜릿, 과일주스 등 당이 들어간 가공 식품)과 정제 곡물(흰 쌀이나 흰 밀가루로 만든 식품)의 최소화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슐린의 요동은 복부 비만과 당뇨병을 만드는 일을 넘어 노화의 가속페달 그 자체다. ☞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면 양을 절반으로 줄이기 : 흰쌀밥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면 양을 절반 정도로 줄여본다. 오히려 혈당이 덜 오르면서 식후의 허기가 덜 느껴질 것이다. 먹는 순서 바꾸기 : 채소를 포함한 식이섬유 → 고기, 생선 등 단백질 → 탄수화물의 순서로 먹는 것이 혈당을 느리게 올린다. 선순환..

Review 2024.03.09

책 / 나를 지키는 관계가 먼저입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나'를 위해 우리에겐 예상 문제 풀이나 일회성 힐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든 크고 작은 갈등의 순간은 찾아오는데,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갈등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내 마음도 모르면서 타인의 마음을 알아내려 하고, 누구를 먼저 ‘손절’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건강한 소통은 타인의 마음을 읽고 움직이는 것보다 자신의 무게 중심을 잡고 내 마음과 먼저 소통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젠 나 자신에게 무게의 중심을 가져올 때이다. 소통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건강한 소통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요구를 솔직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소통’으로..

Review 2024.03.03

책 / 잊기 좋은 이름

나도 안다. 부사는 단점이 많다는 걸. 나 역시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라는 문장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이 더 진짜에 가까운 마음이라곤 말할 수 없으리라. 우리는 늘 우리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이 노련하게 전달되길 원한다. 그러니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이는 촌스럽거나 순진하거나 다급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리라. 실로 부사 안에는 ‘저것! 저것!’ 하고 무언가 가리키는 다급한 헛손가락질의 흔적이 담겨 있다. 부사는 그게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저것! 저것!’ 한다. 그것은 설명보다 충동에 가깝고 힘이 세지만 섬세하지 못하다. 부사는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다. 그것은 실천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만날 ..

Review 2024.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