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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유연하고단단하게 2024. 4. 18. 09:01


종종 나는 사람들에게 60대의 자신의 모습을 딱 한 장면으로 묘사해보라고 말한다. 시선을 멀리, 더 멀리 두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당신이 가장 도착하고 싶은 60대의 한 순간을. 이 상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내가 있는 장소, 그곳의 분위기, 같이 있는 사람, 눈앞에 펼쳐진 풍경, 그때 내가 하고 있는 행동까지 최대한 자세하게 상상해보자. 멀리 떠 있는 풍선 같은 꿈이 아니라, 내 손에 쏙 들어오는 조약돌 같은 단단한 꿈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당신도 이 질문에 답해보길 바란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잠깐 이 책을 떠나도 좋다.


나부터 내가 꿈꾸는 60대를 한번 설명해볼까? 커다란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이 테이블은 20대부터 내가 계속 쓰고 있는 바로 그 원목 테이블이다. 20대부터 평생 나와 같이 늙어갈 테이블로 낙점했으니 그때도 분명 나는 그 테이블 앞에 앉아 있을 것이다. 테이블 앞으로는 조금 큰 창이 있고 창밖으로는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가 햇살을 다 가려서 늦은 오후에도 방은 어둑어둑하다. 변치 않는 내 취향의 조도다. 테이블 위에는 책들이 쌓여 있고, 테이블 뒤로도 옆으로도 책이 가득하다. 책과 테이블과 창문과 나무. 그 가운데 내가 앉아있다. 또 뭔가를 쓰는 중이다. 뭘 쓰고 있는 건지도 골똘히 상상해보았지만 거기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별거 아닌 기록을 하는 중일 수도 있지만, 내 마음에 드는 글을 쓰는 중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다. 남편은 옆방에 있다.


맥락 해부    

상상 속 장면에서 당신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가? 나처럼 글을 쓰고 있는가? 혹은 무엇을 만들고 있는가? 지금 하고 있는 취미 활동을 그때도 하고 있는가? 혹은 정원을 가꾸고 있을 수도 있고, 가족들과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중일 수도 있다. 그게 무엇이든 좋다. 다만 그 행동의 맥락을 잘 살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하자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있는 자신의 60대를 이야기 한다. 바닷가에 느긋하게 앉아있는 60대의 나. 이 장면에도 다양한 맥락이 존재할 수 있다. 여기로 떠나오기 위해 회사 업무를 잔뜩 처리하고 온 것인가? 아니면 이미 은퇴를 해서 이곳에 벌써 두 달째 머무르고 있는 중인가? 겉보기엔 둘 다 ‘바닷가에 느긋하게 앉아 있는 60대’지만 전후맥락이 바뀌면 꿈 자체가 달라진다. 누군가는 60대에도 현역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나를 꿈꿀 수도 있고, 누군가는 그때쯤이면 세상일에서 멀어지고 싶을 수도 있다.
목공을 하고 있는 자신을 상상하는 이도 있다. 오랫동안 목공을 꿈꿔온 당신, 60대의 당신은 이제 막 목공을 배워보고 있는 단계인가? 혹은 젊을 때부터 주말마다 조금씩 목공을 배우다가 60대에는 작은 목공품들을 만들어서 판매를 하고 있는가? 혹은 언젠가 여행 중에 내가 만난 할아버지처럼 낮에는 농사를 짓고 오후에는 목공품을 만들고 있는가?    이렇게 한 장면 속에 숨어있는 맥락까지 파악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 맥락을 알아야 60대의 삶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구체화되기 때문이다. 60대에 작은 목공품이라도 내 이름으로 팔고 싶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 취미를 시작해야 한다. 동시에 60대에 목공 취미를 시작해보고 싶다면, 그리고 다른 일은 더 안하고 싶다면 그럴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누가? 바로 당신이. 언제? 바로 지금부터.


관계 해부

상상 속에 누가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 말한 바와 같이 나의 상상 속에서는 옆 방의 남편이 존재한다. 당신의 상상 속에서는 누가 존재하는가? 킨포크 잡지에 당장 실려도 될 것 같은 근사한 저녁 식사 자리를 상상했다고 가정하자. 당신은 그 식사 자리에 마음 맞는 친구들과 앉아 있다고 상상했는가? 그 친구들은 오래된 친구들인가? 혹은 당신과 공동체를 이뤄서 느슨한 가족의 형태로 살고 있는 친구들인가? 그 식탁엔 가족들이 앉아 있다고 상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때 아이들은 당신과 한 집에 살고 있는 상태인가? 혹은 스무 살이 넘어서 독립을 한 상태인가? 아마 각자 처한 현실에 따라서 등장하는 인물이 다를 것이다. 아예 아무도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미래의 그 장면 속 관계를 해부하다 보면 지금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결국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관계가 상상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평생 데면데면하던 배우자와 갑자기 평생의 친구처럼 지낼 수는 없다. 평소에는 거리를 두고 살다가 나이가 들어서 갑자기 친구 근처에서 살겠다고 선언할 수도 없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는 또 어떻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바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시간을 자주 가진 사람만이 혼자서도 즐겁게 지낼 수 있는 법이다. 그 모든 관계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기회를 충분히 가져야 한다. 가족이라고 무턱대고 내 곁에 있어줄 거라는 생각도 당신만의 착각일 수 있다. 상상 속 그 관계, 당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관계를 위해 지금부터 꽃을 피우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경로 해부

구체적인 상상을 정립했다면 이제 그 상상을 완성시키기 위한 경로도 조금씩 구체화해볼까.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고 카페를 차리라거나, 시골에 집을 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꼭 해보고 싶은 취미가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시간 날 때마다 해본다거나, 친구들과 모임을 조직해보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함께 그 꿈을 이뤄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구체적으로 이 꿈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 꿈을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지금부터 조금씩 해보는 것을 강권한다. 현실의 배를 내가 원하는 미래 쪽으로 조금씩 방향을 트는 것이다.


원하는 60대의 한 장면을 상상해보라는 이야기가 어쩌다 보니 너무 길어졌다. 하지만 그 장면이 당신의 일에, 퇴근 후 시간에, 취미생활에, 가족과의 대화에, 친구와의 관계에,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 나침반이 될 것이다. 당신의 미래를 조금 더 당신이 원하는 쪽으로 이끌어줄 것이다. 그 어떤 것에도 믿음이 부족한 나이지만, 이것만은 명확하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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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에세이, <내 일로 건너가는 법> 중에서

팀장이 되기 전에도, 팀장이 된 후에도, 그리고 일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내내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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