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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 나를 사로잡았던 분노는 어느새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억울하다는 감정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나 좀 알아달라!’며 투덜대게 한다. 방방곡곡 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유일한 임무라는 듯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보다 하지 못하는 일을 하려는 사람일수록 ‘통제’ 욕구가 강하다. 모든 것을 통제하겠다는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더 집착하게 한다. 불행한 가족 이슈에서 해결사를 자처하며 희생양이 되거나, 잘 안 풀리는 연애나 인간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실현 가능성 없는 일들에 사로잡혀 행동하지 않은 채 공상을 이어간다. 이들에게 현실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내가 바뀌거나 남이 바뀌어야 달성되는 신기루 같은 것. 그들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란 어렵다. 심지어 자신조차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하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바꾸려 할 때 삶은 어긋난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일상의 아주 작은 일부터 통제해보는 것이다. 아침 챙겨 먹기, 하루에 3000보 걷기, 밥 먹고 나서 바로 설거지하기 등등. 사소한 실천 목록을 만들어 하나씩 달성하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것을 늘려가는 것이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늘어가는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을 흘려보내기도 조금씩 가능해진다.
얼마 전 SNS에서 본 글귀가 떠오른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남을 통제하려 한다.’ 나는 타인의 감정,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심지어 나의 감정도 통제할 수 없다. 삶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얼마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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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를 싸매며 관련 법을 읽는 동안 법적으로 나의 잘못은 없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세상사 어디 법으로만 해결되던가. 법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 세상에 억울한 사람들이 왜 있을까. 삶은 팩트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팩트보다 중요한 건 기분이다. 나와 이웃은 첫 단추부터 마음 상해가며 끼웠고 결국 여기까지 오고 만 거다.
그런데도 나는 주야장천 법과 상식, 보상을 들먹이고 있으니 사람 마음을 모르는 건지, 알 생각이 없는 건지. 그저 법대로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은 정의로운 사람인가. 그렇다면 과연 나는 정의로운가.
TV 프로그램 〈알쓸인잡〉(tvN)에서 소설가 김영하는 말했다. “개인적으로 경계하는 것 중 하나는 정의감이 들 때예요. 이 정의감이 어디서 왔을까 알아봐야 해요.” 그는 인터넷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거나 글을 올리는 등, 간단하게 정의감을 실현하고 잊어버릴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야말로 정의에 관해 더욱 신중해질 때라고 지적했다. 어쩌면 나와 의견이 맞는 사람에게만 공감 능력을 발휘하면서 그걸 옳음 혹은 정의라 착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이 정확히 나를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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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알지만 다 읽은 사람은 좀처럼 못 본 책 《정의란 무엇인가》의 커다란 주제는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것과 정의가 다르다는 것이다. 책은 도덕이란 뜬구름 잡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적절한 방식, 즉 원활한 인간관계를 의미한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그렇다면 나는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나는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닌가. 그저 피해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내 기분을 망가뜨린 사람에게 비슷한 기분을 돌려주고 싶은 사람은 아닌가.
더불어 과연 나는 이웃을 ‘도덕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겨우 손가락 몇 번 움직여 습득한 사실들을 이미 잘 아는 것인 양 내밀면서 반격했다며 통쾌해하는 사람은 아닌가. 결국 나는 이성적이고 품위 있어 보이고 싶어 몸부림치는, 미성숙하고 감정적인 사람. 하지만 모든 사람은 감정적이다. 나에게 감정이 있는 만큼, 이웃에게도 감정이 있다.
선배의 ‘사람 마음이 다 그렇다’는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된다. 이웃과 친하게 지낼 필요는 없지만 예의를 갖출 수는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각자의 공간에서 편안할 수 있어야 한다. 사는 동네가 점점 무서운 곳이 되고, 집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내가 최종적으로 원하는 것인가.
내가 괴로워한 시간 동안 이웃도 편했을 리 없다. 또 언제 아랫집 사람이 뛰어 올라올지 몰라 마음 졸이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무심코 소음을 낼 때마다 심장이 철렁하지 않았을까. 갑자기 도착한 내용증명에 당황하지 않았을까. 내가 보낸 냉기 어린 문자들에 한 달 내내 기분 나쁘지 않았을까.
이웃에게 모질게 구는 동안 누구보다 내가 고통스러웠다. 싸늘한 말을 내뱉은 날이면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점점 팍팍해지는 나를 대면하면서, 정작 내가 상처 입었다. 나는 이런 사람 아니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이런 사람 싫은데. 아무리 그래 봤자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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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킬 게 있는 사람은 강해지는 것 같지만 오히려 연약해진다. 그리고 각박해진다. 행여나 더 큰 불이익을 볼까 봐 날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그게 과연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마음의 여유는 세상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온다.
억울한 일을 당해도 해결될 거라는 믿음, 내가 타인을 믿는 만큼 타인도 나를 믿어줄 거라는 마음, 행여나 실패하고 넘어지더라도 붙잡아줄 수 있는 안전망이 존재한다는 기대. 우리 사회에는 이것이 희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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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상황을 신속히 해결하는 일에 급급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잊었다. 나는 싸움을 무서워하는 사람. 예상외의 상황에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변하는 사람. 뭐 하나에 꽂히면 주변을 돌아볼 줄 모르는, 이른바 ‘유도리’ 없는 사람. 그러면서도 괴로운 내 마음 하나 다스리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 그런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과연 ‘옳음’일까 ‘적당함’일까.
난데없는 소동으로 차근차근 망가지는 일상을 목도하면서, 우선순위를 잊고 허둥대는 나를 보았다. 옳은 일은 정해져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이 내 길은 아닐 수 있다. 나의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없어 보이고 겁쟁이 같고 도망치는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나에게 맞는 길을 고르는 게 맞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해야 할 것은 그럴듯해 보이는 해결책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바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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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새 없이 움직이는 그의 입술을 마주하다 보니, 더 이상 그에 대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좋아하는 것도 관심이지만 싫어하는 것도 관심이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때 그것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나는 이제 당신에게 감정이 없어요. 그러니 그냥 좋게 끝냅시다. 감정이 없어도 예의를 갖출 수는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건 분노가 아니라 시간이다. 이번 일로 호되게 배운 것이 그거다.
만나면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까.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분노가 폭발하지 않을까. 덜컥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는 않을까. 천천히 숨을 고르며 내가 바라는 결말만을 생각한다. 나는 싸우려고 그를 만나는 게 아니다. 그저 이 상황을 마무리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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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뭐라고. 이게 다 뭐라고 그리도 괴로운 시간을 보내온 걸까. 고통의 시간에 탈탈 털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뒷걸음질 치니 의외로 거기에 해결책이 있었다. 나는 지기로 했다. 싸움을 관두기로 했다. 그러자 상대도 두 손을 들었다. 그러고 나니 상황 종료. 일이 안 될 때는 그렇게도 안 되더니 되려고 하니 이렇게 간단하다.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말을 건네는 순간 내 손을 떠난다. 내 통제 밖의 일은 계산할 수도 없고, 계산한 대로 되지도 않는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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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때, 교수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저는 이 세상에 대화로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사정이 생기면 뭐든 이야기하세요. 제가 들을게요.” 당시에는 그저 마음 넓은 어른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세상의 이치였던 걸까. 대화로 풀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감정이 앞서면 시도 자체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일을 대화로 풀고 나면 생각보다 그게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라는 걸 알게 된다. 바꿔 말하면 나는 이제껏 갈등을 대화로 풀어본 경험이 없었던 거다.
그저 감정을 삭이거나,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나 몰라라 도망치거나 아니면 없던 일처럼 눈을 감았다. 내 감정을 제일 앞으로 내세우고 그걸 몰라주는 세상과 상대를 원망하면서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왔다. 지나치게 심각해지면서. 필요 이상으로 비장해지면서.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알았다. 그럴수록 문제에서 더욱 멀어진다는 것을. 결국 문제가 주인공이 되어 나를 휘두른다는 것을.
- 김신회, <나의 누수 일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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