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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9번의 일

유연하고단단하게 2024. 6. 19. 0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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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를 비스듬히 껴안은 채 휠체어에 기대어 앉은 장인은 말이 없었다. 언뜻 보면 잠이 든 것처럼 보였고 그 순간 그는 장인에게 쓸 만한 영정 사진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후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듯 스스로를 꾸짖으며 역사를 빠져나와 주차장까지 갔다.    
그는 장인을 들어 올리다시피 해서 뒷좌석에 태우고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넣었다. 불편해 보이는 장인의 자세를 여러 번 고쳐주고, 장모가 옆자리에 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자 이마와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그는 시동을 걸기 전 운전대를 잡은 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소한 행동이 장인 내외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차들로 몹시 붐비는 구간을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장모가 말했다.    
우리 때문에 자네가 고생이 많네. 늙어서 아픈 게 뭐 대수라고 번번이 사람을 오라 가라 하고 말이지.    
마침 차선을 바꾸는 데 신경이 팔려 있던 그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지 생각했지만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고, 상향등을 번쩍이며 위협적으로 구는 차들이 그의 신경을 자꾸만 곤두서게 했다.    
장모는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다가 다시 물었다. 이번엔 준오에 대한 이야기였고 준오에 대해서라면 그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렇게 아는 게 없었나 싶을 정도여서 그는 간략하게 답했고 그러고 나자 다시금 말이 끊겼다.    
어색함이 감돌기 시작했다. 백미러 속 두 노인의 표정에서도 그런 기색이 점점 더 또렷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 부부는 준오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맞벌이를 했다. 준오를 자주 처가에 맡겼고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장모(장인과 함께 다녀갈 때도 있었다)가 사나흘에 한 번씩 그들 부부의 집을 오갔다. 준오는 그들 부부가 어렵게 얻은 아이였고 잔병치레가 잦았다. 그것이 늘 장인 내외의 마음을 조마조마하게 했다. 시외버스를 타면 두 시간 남짓 거리.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걷고,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기다리고,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부터 그들 부부의 집까지 걸어오는 두 노인의 모습을 그는 상상해보았다. 그 길이 저 두 분에게 남은 젊음이라 할 만한 것들을 모두 앗아가버렸구나.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 순간은 그런 지난 시절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만한 더없이 좋은 기회인지도 몰랐다. 그의 말 한마디가 자식들에게 불편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점점 주눅이 들고 있는 두 노인의 마음을 조금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 거의 다 왔어요. 괜찮으세요?    
그러나 멀리 병원 건물이 보일 즈음에야 그는 그렇게만 묻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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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판매나 영업 업무가 지난 26년간 통신주를 매설하고, 전화선을 끌어오고, 인터넷 케이블을 연결하던 자신의 현장 업무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따져 묻지 못했다.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교육 영상을 시청하고 감상문을 제출하고, 어려운 경제 용어를 외우고, 복잡한 수치와 계산법을 익히는 것이 수십 년간 설치 기사로 일했던 자신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 것인지도 묻지 못했다. 그런 식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던 동료들이 끝내 밀려나듯 회사를 나가는 걸 그는 많이 봐왔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만 그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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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금껏 해온 이 일이 자신의 일이고 그 외에 다른 일은 할 마음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다시 처음처럼 어떤 일에 매달릴 자신은 없었다. 새로 뭔가를 배우고 익히며 시간과 노력을 쏟을 자신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가 회사에 기대한 건 마땅히 자신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존중과 이해, 감사와 예의 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실은 너무나 당연한 것들을 바란 것뿐이었다.    
나도 당신 마음 모르는 거 아니야. 근데 당신도 알잖아. 한두 달도 아니고 계속 이럴 거잖아. 안 되는 일에 매달리면 뭐 해. 그렇잖아.    
겉으로 보면 그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도 아내도 일을 하고 있었고 모아둔 돈도 있었다. 지출을 줄이면 어떻게든 생활은 이어나갈 수 있을 거였다. 그러니까 해선을 괴롭히는 건 오늘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일들이었다. 내일을 대비할 수 없다는 사실. 대비할 수 없을 거라는 걱정. 그런 두려움이 아내를 몰아붙이고 있는 거였다. 작은 불안의 조짐이 감지되면 그것은 곧장 공포감으로 몸집을 키웠고 거기에 휩쓸려버리는 거였다. 그가 맞서고 있는 것도 실은 실체도 없이 수시로 자신을 휘젓고 다니는 그런 감정들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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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여덟 시간 이상 일을 하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대충 저녁을 먹고 인터넷으로 이런 저런 영상들을 보다가 잠드는 일상. 이런 일상이 언젠가 (타의적으로) 끝날 것이며 그 이후는 내게 암흑처럼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이라는 것. <9번의 일>은 그 막연한 불안의 실체를 잠시 엿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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