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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짤막한 답을 듣자 갑자기 섭섭함이 밀려왔고, 그녀는 콱 죽고 싶어졌다. 지난 주말에 딸이 같이 오지 않고 사위만 보낸 것도 틀림없이 엄마가 꼴도 보기 싫어 그런 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그녀에게 뭔가 부탁해야 할 때는 언제나 사위를 시켰다. 딸이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 게 열세 살 때부터였는지 열다섯 살 때부터였는지 그 시점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그즈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부터 딸과 통화를 하고 나면 그녀는 몸 쓰는 일을 찾아야 했다. 오이를 10킬로그램씩 사다가 오이지를 담그거나 베란다 화분들을 싹 다 분갈이했고, 그러지 않으면 찬장의 냄비들을 모조리 꺼내어 베이킹소다로 박박 닦는 식이었다. 마음이 심란해지면 몸을 쓰는 건 장사할 때부터 그녀의 몸에 밴 습관이었다. 매상이 앞집 과일가게보다 떨어진 날이나 진상 손님을 만나 목청 높여 싸운 날이면 그녀는 락스를 물에 풀어다가 가게의 선반과 소쿠리들을 닦았다. 그럴 때면 남편은 뭘 그런 일로 속을 썩느냐며 혀를 찼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녀는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남편은 결혼 전부터 트럭을 몰고 다니며 과일을 팔았으면서도 다세대주택 밀집 지역의 재래시장에서는 살 과일을 정해놓고 찾아오는 손님보다는 채소를 사러 나왔다가 싼 과일이 눈에 띄면 덤처럼 한두 개 집어가는 손님이 더 많다는 것도 끝내 모르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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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그녀는 평소처럼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리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잠이 오지 않아서 한참을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앵무새를 생각했고, 또 조금 더 많이 생각했다. 그러다 새벽 세시쯤 되었을 때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장을 열었다. 그리고 미처 버리지 못한 노트를 꺼내어 식탁 앞으로 갔다. 커튼을 치지 않은 거실 유리창 너머로 고요함이 감도는 먹빛이 가득 들어찬 게 보였다. 마른바람이 가늘어진 나뭇가지들을 흔들고 지나가는 소리만 간간이 들렸다. 그녀는 자리에 앉아 빈 페이지를 펼쳤다. 무언가 쓰고 싶었지만 무엇을 써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마음을 들여다보세요.” 강사는 수업시간에 그렇게 말하곤 했다. 글을 쓰기 위해선 마음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하지만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지, 너무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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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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