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96

책 / 우리 사랑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하지 않으리

장덕준 씨는 쿠팡 칠곡 물류센터에서 물류 작업을 하는 이십대 노동자였다. 그는 퇴근길에 편의점에 들러 여동생에게 줄 간식을 사곤 했다. 마지막 퇴근길에는 웨하스를 샀다. 웨하스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탄 그의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훗날 그의 가족들은 몇 번이고 돌려보게 된다.        그는 쿠팡에서 일한 지 1년 4개월 만에 과로사했다. 과로사의 대표적인 유형인 급성심근경색으로 인한 죽음이었다. 그의 근무시간은 주당 평균 62시간 10분이었다. 그는 하루 평균 5킬로그램씩 100개, 30킬로그램씩 40개의 택배 상자를 날랐다. 일터에서의 걸음 수는 하루 평균 5만 보였다. 1년 사이 체중이 15킬로그램가량 빠졌다. 그는 2020년 10월 12일 새벽 6시, 야간 근무를 마치고 귀가한 직후에 죽었다..

Review 2024.07.12

책 / 일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여행은 일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꿈꾸는 그곳은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지금,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그곳에서도, 그때, 불만족스러울 것이다. 매일 먹는 바게트가 지겨울 테고, 대화할 상대가 없는 일상의 외로움에 몸서리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땐 그것이 또, 일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의 의무는, 지금, 이곳이다. 내 일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리하여 이 일상을 무화(無化)시켜버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나의 의무이다.-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일상에 매몰되지 않는 것, 의식의 끈을 놓지 않는 것, 항상 깨어 있는 것,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것, 부단한 성실성으로 순간순간에 임하는 것,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 것, 오직 지금만을 살아가는 것..

Review 2024.07.02

책 / 비극이 알려준 긍정의 태도

모든 자책과 원망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차츰 이성의 끈을 붙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어떤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구하기 위해 그 구절이 나에게 온 것이다. 나의 어처구니없는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 구절이 나에게 도착한 것이다.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그렇다.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다. 아무리 원망을 하고 있어봤자 바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나의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오직 바꿀 수 있..

Review 2024.07.01

영화 / 인사이드아웃2

1사춘기에 들어선 라일리에게 새로 생기는 감정들: Anxiety, Envy, Boredom, Embarrassment. 일꾼들이 우르르 몰려와 감정 통제 본부를 때려 부수고 리모델링하는 부분은 사춘기의 감정 소용돌이를 아주 섬세하고 놀랍게 표현했다. 물론 이 영화 속의 다른 장면들에도 하나 하나 곱씹어 볼 수 있는 여지들이 풍부하게 존재한다. 예컨대 영화 마지막에 불안이가 예측 불가한 미래를 상상하며 불안해하자 시험 공부 같은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 불안이를 집중하게 만드는 것도 탁월한 장면이었다.2나는 항상 내 모든 성취에 있어서 최고의 동력은 불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부분을 영화가 (우려하거나 지양하는 대신) 사랑스럽게 표현해 주어서 고마웠다. 불안도 결국 내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

Review 2024.06.29

책 / 9번의 일

- 지팡이를 비스듬히 껴안은 채 휠체어에 기대어 앉은 장인은 말이 없었다. 언뜻 보면 잠이 든 것처럼 보였고 그 순간 그는 장인에게 쓸 만한 영정 사진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 후엔 불길한 생각을 떨쳐내듯 스스로를 꾸짖으며 역사를 빠져나와 주차장까지 갔다. 그는 장인을 들어 올리다시피 해서 뒷좌석에 태우고 휠체어를 접어 트렁크에 넣었다. 불편해 보이는 장인의 자세를 여러 번 고쳐주고, 장모가 옆자리에 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자 이마와 등줄기에서 땀이 흘렀다. 그는 시동을 걸기 전 운전대를 잡은 채로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소한 행동이 장인 내외를 불편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차들로 몹시 붐비는 구간을 간신히 빠져나왔을 때 장모가 말했다. 우리 때문에 자네가 고생..

Review 2024.06.19

책 / 40일 간의 남미 일주

- 가능하면 긍정적인 면만 볼 것. 머릿속에 떠오르는 부정적인 염려와 두려움을 지울 것. 그리고 친절하게 웃을 것. 삼십 분 전에 주문한 전통 샌드위치가 이제 나왔다. 삼십 분을 조리한 것 치곤, 대체 어디에 공을 들였나 싶을 만큼 식빵 안에 햄과 치즈 한 장이 있을 뿐이다. 시간이 생명인 서울역의 던킨도너츠에서는 1분 만에 나오는 것이지만, 나는 다시 이 현상의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했다. 덕분에 기다리는 삼십 분 동안, 나는 이 글을 다 쓸 수 있었다. 멕시코는 나를 진정 작가로 거듭나게 하는 곳이고, 이곳에서 나는 긍정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지도 모른다. - 내 가방 속에 있는 유산균 가루가 마약으로만 의심받지 않는다면, 그래서 멕시코시티 국제공항에서 억류된 채 ‘한국의 소설가, 카르텔의 마약 운..

Review 2024.05.27

책 / 좋아하는 걸 좋아하는 게 취미

여행자의 눈에, 집 안팎을 공들여 가꾸는 코르도바 사람들의 손길은 그저 감탄스러웠다. 그들은 마치 꽃에게 그러하듯 매일의 일상을 정성껏 돌볼 것 같았다. 오늘 하루를 시들게 두지 않으려는 사람들. 물을 주고 마른 잎을 떼어내며 오늘을 돌보는 사람들. 집 안에 하늘을 들이고 꽃밭을 가꾸는 마음이라면, 내가 모르는 삶에 대한 어떤 대답을 알고 있을 것도 같았다. 그 답을 들으려, 그 시절 나는 발 아프도록 골목골목을 돌아다녔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안다. 사실은 ‘꽃의 거리’까지 가지 않아도 있다는 걸. 매일 물을 주고 잡초를 뽑으며 일상을 가꾸는 사람들이. 옛날 주택 대문 위의 좁다란 화단에 삐죽삐죽 자라는 대파를 심어둔 아주머니, 스티로폼 박스에서 키워낸 방울토마토 세 그루가 자랑인 아저씨, 고무 대야 ..

Review 2024.05.17

책 / 좋은 곳에서 만나요

희재와 엄마 가운데로 고개를 내밀었다. 넘실거리며 끝없이 흐르는 넓은 강 위로 초여름의 부드러운 햇살이 부서지고 있었다. 테두리를 둘러 띄워놓은 부표마다 갈매기들이 하나씩 앉아 몸을 부풀렸다. 이제 막 푸르러지기 시작한 강변의 나무들과 강 건너에 선 크고 작은 건물들, 멀리 다리 위를 지나는 차들까지 이미 수백수천 번을 본 풍경이지만 특별하게 새롭고 아름다웠다. 저기 좀 봐, 멋있지. 나는 희재와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말하고 나니 그제야 예전부터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전에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말이었다. - 이유리, 중에서

Review 2024.05.17

책 / 한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종종 나는 사람들에게 60대의 자신의 모습을 딱 한 장면으로 묘사해보라고 말한다. 시선을 멀리, 더 멀리 두고 상상해보는 것이다. 당신이 가장 도착하고 싶은 60대의 한 순간을. 이 상상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내가 있는 장소, 그곳의 분위기, 같이 있는 사람, 눈앞에 펼쳐진 풍경, 그때 내가 하고 있는 행동까지 최대한 자세하게 상상해보자. 멀리 떠 있는 풍선 같은 꿈이 아니라, 내 손에 쏙 들어오는 조약돌 같은 단단한 꿈으로 바꾸기 위해서다. 당신도 이 질문에 답해보길 바란다.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잠깐 이 책을 떠나도 좋다.나부터 내가 꿈꾸는 60대를 한번 설명해볼까? 커다란 방 한가운데에 커다란 테이블이 있다. 이 테이블은 20대부터 내가 계속 쓰고 있는 바로 그 원목 테이블이다. 20대부터 평생..

Review 2024.04.18

책 / 느리게 나이 드는 습관

효율적으로 먹기 : 내가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 [ 3차원 절식 1단계 ] 빠르고 해로운 탄수화물을 걷어내라 노화 속도 제어를 위한 3차원 절식의 첫 번째는 단순당(설탕, 꿀, 사탕, 초콜릿, 과일주스 등 당이 들어간 가공 식품)과 정제 곡물(흰 쌀이나 흰 밀가루로 만든 식품)의 최소화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인슐린의 요동은 복부 비만과 당뇨병을 만드는 일을 넘어 노화의 가속페달 그 자체다. ☞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면 양을 절반으로 줄이기 : 흰쌀밥을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한다면 양을 절반 정도로 줄여본다. 오히려 혈당이 덜 오르면서 식후의 허기가 덜 느껴질 것이다. 먹는 순서 바꾸기 : 채소를 포함한 식이섬유 → 고기, 생선 등 단백질 → 탄수화물의 순서로 먹는 것이 혈당을 느리게 올린다. 선순환..

Review 2024.03.09

책 / 나를 지키는 관계가 먼저입니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는 '나'를 위해 우리에겐 예상 문제 풀이나 일회성 힐링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어떤 관계든 크고 작은 갈등의 순간은 찾아오는데, 문제는 갈등 자체가 아니라 갈등에 반응하는 방식이다. 여기서 우리는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한다. 내 마음도 모르면서 타인의 마음을 알아내려 하고, 누구를 먼저 ‘손절’해야 할지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건강한 소통은 타인의 마음을 읽고 움직이는 것보다 자신의 무게 중심을 잡고 내 마음과 먼저 소통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젠 나 자신에게 무게의 중심을 가져올 때이다. 소통은 이기고 지는 싸움이 아니다 건강한 소통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고 요구를 솔직하고 분명하게 전달하면서 동시에 서로의 권리를 존중하는 소통’으로..

Review 2024.03.03

책 / 잊기 좋은 이름

나도 안다. 부사는 단점이 많다는 걸. 나 역시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라는 문장보다 ‘당신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 그러나 그중 어느 것이 더 진짜에 가까운 마음이라곤 말할 수 없으리라. 우리는 늘 우리의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지만 동시에 그것이 노련하게 전달되길 원한다. 그러니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이는 촌스럽거나 순진하거나 다급한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이리라. 실로 부사 안에는 ‘저것! 저것!’ 하고 무언가 가리키는 다급한 헛손가락질의 흔적이 담겨 있다. 부사는 그게 무엇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그냥 ‘저것! 저것!’ 한다. 그것은 설명보다 충동에 가깝고 힘이 세지만 섬세하지 못하다. 부사는 동사처럼 활기차지도 명사처럼 명료하지도 않다. 그것은 실천력은 하나도 없으면서 만날 ..

Review 2024.02.09

책 /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

- 정제곡물과 단순당, 초가공식품은 체내에서 혈당을 올리는 능력인 당부하(glycemic load)가 높고 보상회로에서 도파민과 엔도르핀을 잘 분비시킨다. 혈당이 근육이 흡수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 모든 잉여 에너지는 뱃살(그리고 지방간과 근내지방)로 간다. 인간 푸아그라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 운동을 하지 않고 근육을 쓰지 않으면 당처리 체계의 성능이 떨어져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혈당은 더 높아진다(인슐린저항성). 더 많은 에너지가 뱃살로 간다. 혈당이 높아지면 췌장을 쥐어짜 인슐린이 쏟아져나온다. 잠도 쏟아진다. 이렇게 졸다 깨면 갑자기 당이 당긴다. 인슐린이 급히 혈당을 떨어뜨린 탓이다. 갑자기 떨어진 혈당은 스트레스호르몬의 양대 산맥인 노르에피네프린과 코르티솔을 분비시킨다. 음식이 당겨 어쩔..

Review 2024.01.24

책 / 때론 대충 살고 가끔은 완벽하게 살아

- 하지만 어차피 모든 과거는 후회스럽고 모든 미래는 불안하다. 그래서 나는 어느 순간의 선택도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 회사를 다니며 일과 관련한 루틴은 많았다. 출근하자마자 마시는 커피, 퇴근 전 꼭 한번 다시 체크하는 이메일, 잠들기 전 내일 해야 할 일을 메모하는 것 등. 돌이켜보니 나를 위한 루틴은 없었다. 야근이 없는 날이면 꼭 누군가와 약속을 정하고 꼭 뭐라도 하고 집에 가던 그 시절과는 달리 지금의 나는 나를 위한 루틴이 많아졌다.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차 한 잔, 집을 나서기 전 고르는 책 한 권, 책방에 오자마자 오늘의 음악을 고르는 일, 매주 가장 맛있는 제철과일과 신선한 우유를 사 두는 일 등. 루틴은 안정적인 하루를 만든다. 나의 튼튼한 하루가 쌓여 나의 튼튼한 삶이 된다. 나를..

Review 2024.01.21

책 / 나의 누수 일지

- 맨 처음 나를 사로잡았던 분노는 어느새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억울하다는 감정은 사람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나 좀 알아달라!’며 투덜대게 한다. 방방곡곡 이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 유일한 임무라는 듯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보다 하지 못하는 일을 하려는 사람일수록 ‘통제’ 욕구가 강하다. 모든 것을 통제하겠다는 마음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더 집착하게 한다. 불행한 가족 이슈에서 해결사를 자처하며 희생양이 되거나, 잘 안 풀리는 연애나 인간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거나, 실현 가능성 없는 일들에 사로잡혀 행동하지 않은 채 공상을 이어간다. 이들에게 현실은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내가 바뀌거나 남이 바뀌어야 달성되는 신기루 같은 것...

Review 2024.01.12

책 / 상실의 기쁨

- 삶이 시다 못해 쓰디쓴 레몬을 내민대도 당신은 그것으로 레모네이드를 만들 수 있다. 이것은 내가 얻은 큰 배움이었다. - 나는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들을 그저 피상적으로만 보고, 서로에게 불편하지 않은 의례적인 질문만을 한다. 그들을 여러 조각으로 편집해 그중 가장 덜 복잡하고 가장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부분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우리가 충분히 알아보지 못한 마음의 상처가, 우리가 충분히 추앙하지 않은 승리가 있다. - 유머.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에서 빠져나오려면 공포를 실소로 바꾸는 풍자와 독설이 필요하다. 도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나의 경험에서 얻은 교훈이기도 했다. 나는 이것이 마법을 발휘하는 순간들을 경험했다. 그것은..

Review 2023.12.13

책 / 아주 환한 날들

- 딸의 짤막한 답을 듣자 갑자기 섭섭함이 밀려왔고, 그녀는 콱 죽고 싶어졌다. 지난 주말에 딸이 같이 오지 않고 사위만 보낸 것도 틀림없이 엄마가 꼴도 보기 싫어 그런 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은 그녀에게 뭔가 부탁해야 할 때는 언제나 사위를 시켰다. 딸이 그녀에게 존댓말을 쓰기 시작한 게 열세 살 때부터였는지 열다섯 살 때부터였는지 그 시점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들의 사이가 틀어진 것은 그즈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언젠가부터 딸과 통화를 하고 나면 그녀는 몸 쓰는 일을 찾아야 했다. 오이를 10킬로그램씩 사다가 오이지를 담그거나 베란다 화분들을 싹 다 분갈이했고, 그러지 않으면 찬장의 냄비들을 모조리 꺼내어 베이킹소다로 박박 닦는 식이었다. 마음이 심란해지면 몸을 쓰는 건 장사할 때부터..

Review 2023.12.02

책 / 무지개떡처럼

엄마는 후회를 정말 많이 한다. 틈만 나면 후회를 한다. 젊은 시절의 잘못된 선택과 결혼, 그 이후의 달라진 삶과 노년으로 접어든 지금의 삶을 모두 다 후회한다. 어찌나 후회가 깊고 자세한지 엄마의 말을 듣다보면 엄마를 환생시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다시 태어나서 엄마가 원하는 인생을 후회 없이 살아봐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 마음 한편으론 나는 절대로 엄마처럼 후회화며 살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어떤 선택을 하든 열심히 그것을 하고, 후회는 절대로 하지 않는 것으로 말이다. 그러나 살아보면 안다. 후회가 자꾸만 고개를 쳐드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때마다 나는 상황을 완벽히 통제해보려는 어리석은 노력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렇게 하지 마. 그러면 잘못되잖아. 이렇게..

Review 2023.12.02

책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서한지는 김월희가 다시 일을 시작하기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일을 하려면 김월희는 자신이 왜 아픈지를 깨달아야 할 것이다. 결국 자신에게 벌주려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걸 말이다. 서한지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엄마, 대단한 인생을 살 필요는 없어. 엄마가 좋아하는 알밤, 그걸 떠올려봐. 벌레 먹은 밤을 집어 들면 에잇 속았다, 그런 표정으로 웃잖아. 인생도 그런 마음으로 살면 돼. 자꾸 벌레 먹은 밤만 집어들어서 속상해도 웃어넘기고 마는 거처럼, 그냥 그런 마음으로 살면 돼. 대단해지려고 하지 마. 남들하고 비교하느라 엄마가 그렇게 속이 아픈 거야. 엄마는 엄마의 길을 묵묵히 가면 돼. 그것이 지극히 초라한 길이어도. 서한지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결국 입을 열었을 때 튀어나온 말은 이러했다..

Review 2023.12.02

책 / 엄마를 절에 버리러

- 끝없이 이어지는 빚을 갚다가 모든 걸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나의 가족을 내다 버리고 싶었다. 그날 나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엉뚱한 역에 내렸고, 난생 처음 동작대교를 걸으며 나에게 가족을 버릴 만한 결단력이 있는지 고심했다. 우리가 가족으로 맺어져 있는게 슬프고 한스러웠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더라도 부모와 전혀 모르는 사이가 되고 싶진 않았다. 서로를 아예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삶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가족으로 만나, 이번엔 돈이 아주 많은 가족으로 만나 서로에게 든든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싶었다. 돈이 많으면 그런 가족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으니까. 돈 떄문에 서로를 불신하고 불편하게 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

Review 2023.12.02

책 / 홈 파티

다만 이연은 웃고 떠드는 와중에도 그들에게서 알 수 없는 힘을 느꼈다. 상대에게 직접 가하는 힘이라기보다 스스로를 향한 통제력이라 할까, 오랜 시간 ‘판단’과 ‘선택’이 몸에 밴 이들이 뿜어내는 단단하고 날렵한 기운이었다. 얼핏 사람 좋아 보이는 박도 마찬가지였다. 이연은 자신이 대상을 편견 없이 대하는 태도에 작은 만족을 느꼈다. 타고난 성정이라기보다 수양의 결과였다. ‘어렸을 땐 정말 타인을 시시콜콜 판정했는데……’ 지난 세월, 시간의 물살에 깎이고 깨지며 둥글어진 마음이 있었다. 실제로 이십여 년간 이연이 여러 인물에게 자신의 몸을 빌려주며 깨달은 사실은 단순했다. 그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자리에 서보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오해와 갈등이, 드라마가 생겼다...

Review 2023.12.01

책 / 진주의 결말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어. 지금은 공책에 써서 지우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

Review 2023.11.30

책 / 연희동의 밤

- 나는 나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대꾸했다. 아마도 내 마음 속에선 그보단 아름다운 노래이기 때문이겠지. 뭐든 그렇잖아. 마음속에서 꺼내어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순간 갑자기 초라해 보이잖아. 분명히 그보단 아름다웠는데. 그래서 나는 사람들 앞에 소중한 걸 꺼내놓지 않아. 언니는 그게 좋은 건 아니라고 하더니, 내게 마음을 좀 열고 살라고 했다. 나는 언니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나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종종 서로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마음이 서로를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를 보살피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게 신기했다. 언니는 알코올램프를 살짝 살짝 흔들며 심지에 붙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가끔 드라마 속 인물이 부러워. 모두가 기억해주는 삶을 살잖아. 가짜인..

Review 2023.11.19

책 / 미조의 시대

- 낙성대역 인근 전셋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얼추 맞았고, 위치도 좋았다. 물론 반지하였지만. 언니 말대로 5천만 원으론 지상의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곁에서 함께 부동산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엄마는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제 빨래를 어떻게 말린다니. 엄마는 빨래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고작 빨래 문제만 걱정하는 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빨래방 가서 건조기로 말리면 되니까 걱정 마. 어딜 가든 살아. 다 마찬가지야. 나는 수영 언니나 할 법한 말을 엄마에게 해주었다. - 중증 우울증 판정을 받았을 때 엄마에게 노트북을 가져다주며 뭐든 써보라고 했다.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다독이는 습관이 있었기에 엄마도 그렇게 해보길 바라서였다. 그러나 엄마는 긴 글은 쓰기 싫어했고, 단상 같은 것을 기록하..

Review 2023.11.13

넷플릭스 / 서부전선이상없다

국가 혹은 전체를 위한다는 대의를 명분으로 개체를 무시하는 데서 비극은 일어난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과연 값진 일인가? 그 어떤 희생에도 당의성이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게 그냥 살인이고 자살일 뿐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과연 국가는 개인을 보호하고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물론 국가의 순기능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다른 시스템적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국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스스로를 살찌우고 융성하기 위해 타자와 심지어는 국가 내부의 개체들까지 파괴한다. 그리고 공권력을 쥔 사람들은 대개 선의가 아닌 사익을 위해 국가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 전쟁은 결코 단순한 오락이나 자극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엔터테인먼트 상품..

Review 2023.11.13

책 / 기억의 뇌과학

Part 1. 기억의 과학 - 어떤 기억이건 생성되려면 반드시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쇼핑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주차 구역이 어디인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나중에 차를 찾느라 애를 먹겠지만 이것은 주차한 위치를 잊어서가 아니다. 이 경우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주차 위치에 대한 기억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 “그 초여름 밤 생각나? 굴이랑 스모어를 먹으면서 레이디 가가의 노래를 들었잖아. 애들이 해변에서 축구를 했는데 막내 수지가 해파리에 쏘였었지”라는 기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각각의 경험에 대응해 서로 무관하게 일어나던 신경 활동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후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구조가 변화하면서 이 패턴은 지속성을..

Review 2023.10.24

책 / 아가씨 유정도 하지

‘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건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요.’ 이것은 내가 육 년 전 뉴욕 여행에 갖고 갔었던 책의 한 구절이다. 그 책에서 왜 이 부분이 적힌 페이지를 접어놓았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행이란 죽음의 예행연습이라는 어머니의 말은 잊히지 않는다. 그 여행 내내 어머니는 검은색 수첩을 갖고 다녔고 그 안에는 빛바랜 내 신춘문예 당선 기사가 간직돼 있었다. 코니아일랜드에 함께 갔던 여성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 수첩은 이제 내가 갖게 되었다. 이따금 나의 가..

Review 2023.10.18

책 /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 자전거의 가격이나 사양, 무엇보다 마이크가 거기에 들인 정성에 대해서는 민영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이크는 무엇이든 원하는 걸 갖기까지 신중하고 가진 다음부터는 소중히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실감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해야 할 때 편하다는 이유로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을 전가하는 건 안이하고 옹졸한 태도였다. - 내세울 만한 스펙이 별로 없는 승아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글솜씨로 곧잘 자신을 포장하곤 했다. 그녀가 내세우는 장점은 주로 성실성과 적응력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있다고 강조하는 건 원하는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이기 십상이다. 승아가 생각할 때 그것은 도전 정신과 창의력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할 수 있어!라고 하기..

Review 2023.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