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96

책 /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 삼촌은 원래가 호탕한 성격이라 말투도 행동도 거침이 없어 때로는 적을 만들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사랑이 참 많았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오빠들은 어머니가 계셨다. 삼촌은 부모가 없었으니 마음 기댈 곳도 없었으리라. 부모 없이 형수 손에 자란 삼촌은 막내임에도 집안 대소사에 앞장섰다. 심성이 곧고 사랑이 많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시선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생각에 올바르다고 여기면 그에 충실히 따랐다. 나는 안다, 결핍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성장시키기도 한다는 걸. -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어머니, 저 막둥이 순자에요. 그곳에서 평안하신지요? 내일이 추석이라 그런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젯밤 꿈에 어머니를 뵈었어요. 어린 제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걸어가시다 엄지만 한 ..

Review 2023.09.30

책 / 2023 트렌드코리아

1. Redistribution of average ‘평균’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집단을 대표하는 평균값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대푯값으로서 평균이 의미 있으려면 해당 모집단이 정규분포를 이뤄야 하는데,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분포의 정규성이 크게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이 기준성을 상실하는 경우는 ① 양극단으로 몰리는 ‘양극화’, ② 개별값이 산재散在하는 ‘N극화’, ③ 한쪽으로 쏠리는 ‘단극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평균 실종’ 트렌드의 배경은 구조적이고 추세적이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속성을 지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이 2년 넘도록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경제·사회·교육·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가 가속화됐다. 각종 소셜미디어를..

Review 2023.08.26

책 / 2022 트렌드코리아

1. 나노사회로의 전환 - 갈등과 분열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간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했던 세계는 자원, 외교, 안보를 중심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 시장에서도 나노타깃을 대상으로 하는 ‘나노시장’ 현상이 두드러졌다. 나노시장은 두 가지 형태로 전개됐다. 첫째, 타깃이 작아지다 못해 나노 단위로 쪼개지는 ‘나노타깃팅’이다. 1명의 소비자가 1개의 시장을 넘어 0.1개의 시장으로 규정되면서 개인과 맥락을 최적화하는 초개인화 기술도 함께 성장했다. 둘째, 타깃의 미세화에 따라 산업 형태도 소형화됐다. 개인 간 물건을 거래하는 플랫폼이 성장하고, 소비자의 선호를 기반으로 신속하게 생산·판매하는 ‘나노유통’이 확산했다. - 유통시장 역시 더 작은 단위로 쪼개졌다. 소비자의 취향이 미세화되는 만큼, 이를 빠르게..

Review 2023.08.26

책 / 데이터 분석가의 숫자유감

1.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데이터를 보면서 흔히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한다. 상관관계는 두변수가 얼마나 상호 의존적인지를 의미한다. 이를 파악하는 방법은 한 변수가 증가하면 다른 변수가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하되 그 추이를 따르는 식이다. 이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상관계수*다.* 여러 데이터를 분석할 때 그 추이가 비슷한지를 확인하는 데 상관계수를 보통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피어슨 상관계수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스피어만 상관계수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과거의 값이 현재의 값에 영향을 계속 미치는 ‘자기상관성’이라든가, 누락된 변수에 대한 ‘편향성’*이라든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날씨 같은 ‘외생 변수’의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상관관계가 ..

Review 2023.08.23

책 / 모래로 지은 집

-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내 말에 모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모래를 어떻게 아프게 할지 나는 알았다.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 “사람은 변할 수 있어. 그걸 믿지 못했다면 심리학을 공부할 생각은 못했을 거야.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1학년 말, 전공 선택을 하면서 공무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이 궁금하고,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다면서. 타고난 부분이..

Review 2023.08.19

책 / 지나가는 밤

- 언제나 주희였다. 싸우고 나서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던 사람은. 쪽지로, 핸드폰 문자로, 지나가는 윤희의 팔을 붙잡고 멋쩍게 웃었던 사람은. 지금도 주희는 예전처럼 이 관계를 돌보려 하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을 애써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면서. 그런데도 윤희는 그 마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Review 2023.08.19

책 / 후회가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듭니다

후회에 관한 유의미한 발견은 무엇이었나요? 사람들은 너무도 다양하게 많은 것을 후회하더군요. 연애, 재정, 가족, 교육 등등. 그 심층구조를 들여다보니 후회는 4가지로 정리됐어요. 첫째, 삶의 안정적 인프라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기반성 후회. 둘째, 성장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대담성 후회. 셋째, 양심적이지 못한 일에 대한 도덕성 후회. 넷째, 더 사랑하고 손 내밀지 못한 관계성 후회입니다. 하지 않은 일을 더 많이 후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소 지으며)이미 한 행동에 대한 후회는 선택지가 있어요. 괴롭혔던 사람에게 사과할 수도 있고, 흉한 문신은 지울 수도 있죠. 차선책으로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어요. 가령 “그 사람이랑 결혼한 건 후회하지만 ‘적어도’ 예쁜 두 아이를 얻었잖아”처럼요...

Review 2023.08.19

책 / 선한 사람이 이긴다는 것, 믿으세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컵 하나를 가지고 보디와 마인드와 스피릿을 설명하셨지요. 우주와 나의 거리가 당겨진 흥분감에 저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뤘어요. 하하. 지금까지 유명한 철학자의 말은 다 어려웠어요. 어렵게 얘기해야 그 사람 이름이 오래 남거든. 음식 먹고 체해야 뭘 먹었는지 생각하지. 소화 잘 되면 뭐 먹었는지 기억이나 해요? 그래도 내가 다시 쉽게 말해줄게요. 여기 컵이 있죠? 이게 육체예요. 죽음이 뭔가? 이 컵이 깨지는 거예요. 유리그릇이 깨지고 도자기가 깨지듯 내 몸이 깨지는 거죠. 그러면 담겨 있던 내 욕망도 감정도 쏟아져요. 출세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돈 벌고 싶은 그 마음도 사라져. 안 사라지는 건? 원래 컵 안에 있었던 공간이에요. 비어 있던 컵의 공간. 그게 은하수까지 ..

Review 2023.08.17

책 / 그 여름

- 이경은 서서히 이해하게 됐다. 수이가 자신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던 건 수이의 그런 성향 때문이라고. 수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 이경만큼의 생각을 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수이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의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것이 수이의 방식이었다. 수이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그것이 자기 인생에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까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반면 이경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생각했고, 어떤 선택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어떤 선택을 하더..

Review 2023.08.17

고요한 사건

헐벗어가는 아카시아나무 뒤에서 무호가 초 대신 폭죽을 꽂은 케이크를 들고 나오자 해지는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무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닌가. 좋아한 것은 아니었나. 어쩌면 우리 셋의 관계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어버렸음을 깨닫는 순간 느낀 허전함이 나를 착각하게 만든 것뿐이었을까. 하지만, 아무튼, 그 순간에는, 크림 범벅의 케이크 위로 반짝이는 불꽃과 그 너머 어른거리는 무호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사실은 내가 무호를 얼마간 좋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그렇더라도, 나와 무호의 삶이 교차할 수 있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고, 우리는 이제 몇 년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완전히 다른 길을..

Review 2023.08.11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시작은 지금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 회사의 어떤 사정(사내 정치 싸움의 작은 나비효과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 때문에 엉뚱한 부서로 옮기게 되면서부터였다. 인사과에서는 해당 분야에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어 걱정하는 나에게 첫 두 달은 복잡한 업무들을 차근차근 익히는 일종의 견습 기간일 테니 부담 갖지 말라고 안심시켰지만, 새 부서 새 직속 팀장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첫 주부터 그는 나를 이 부서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을 대충 다 알고 있어야 마땅한 n년 차 경력자쯤으로 대했다. 이름도 처음 듣는 일을 무턱대고 시켜놓고는 머뭇대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어떻게 아직 이것도 모르냐고 툴툴대며 알려주는 식이었다. 그마저도 완전치 않아서 자주 밤을 새가며 독학으로 일을 터득해야 했고, 그런 결과물은 대개 완전치 못..

Review 2023.07.24

다정소감

- 무엇보다 공포를 버텨내는 힘이 달라졌다. 그라운드 위에서나 그라운드 밖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물리적 충돌을 대면하는 수밖에 없다면 여차하면 나도 육탄 방어할 거야, 때릴 수 있다면 나도 같이 때릴 거야,라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공포가 조금 줄었다. 진짜로 그럴 수 있든 없든(아마도 실제 상황이 닥치면 못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이지만), 그런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았을 때는, 백지처럼 새하얘진 머리와 함께 온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당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는 점도 공포의 요인이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상상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고통을 떠올리며 더 심하게 얼어붙곤 했다. 그런데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

Review 2023.07.06

유투브 / 뉴스안하니

요새 뉴스안하니라는 유투브 채널을 열심히 보고 있다. MBC 아나운서들의 일상 이야기가 업로드 되는데 같은 직장인으로서 애환과 공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정말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아나운서들이 많은데, 높은 경쟁률을 뚫고 거르고 걸러서 뽑힌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 그런가 보다. 아니면 특히 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아나운서들이 관계가 좋고 섭외가 쉬워서 자주 노출 되는 걸지도. 나도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 좋겠다(하지만 극 내향형이라 같이 못 놀듯) 혹은 내가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회사생활 판타지를 보는 느낌으로 애청하고 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아나운서는 박소영 아나운서인데 신입사원인데도 늘 밝고 귀엽고 주눅들지 않는다. 사람이 맑고 악의가 없다는 것이 말하는 것과 표정에서 전해진다...

Review 2023.06.23

책 /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법

- 자존감은 불안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뭔가 조그만 일이라도 하면서, 작은 변화를 경험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더 깊게 해보기를 꺼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심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보다 힘든 부분을 심리학 용어로 포장하는 것이 더 쉬우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누구에게나 쓰일 수 있는 용어를 통해 진짜 나를 돌아보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특별한 해결책이 없는 근사한 심리 용어에 도망치는 것보다는, 불안한 상태에서 작은 변화라도 만들 수 있을 때, 그 결과로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남이 저런 일을 겪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도 막상 스스로에게는 더 관대하지 못합니다. ‘객관적으로’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스스로에게..

Review 2023.06.22

살고 싶다는 농담

-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이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한 게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Review 2023.06.16

책 / 신경 끄기 연습

- 스포트라이트란 한 사람만 밝게 비추는 조명을 말한다. 우리는 마치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처럼 주위 사람들 속에 혼자 떠 있는 느낌을 자주 느낀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마음의 효과를 스포트라이트 효과spotlight effect(조명 효과)라고 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보면 대부분 자기 자신을 걱정하느라 바빠서 다른 사람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즉, 주위 사람들은 나에게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라고 걱정하고 신경 써 가며 생활할 필요가 전혀 없다. - 호감을 얻는 것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움을 사지 않는 것은 본인의 마음가짐이나 약간의 주의로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헤..

Review 2023.06.16

책 / 도파미네이션

1. 쾌락과 고통의 이중주 - 우리는 모두 고통으로부터 도망치려 한다. 어떤 사람은 약물을 복용하고, 어떤 사람은 방에 숨어서 넷플릭스를 몰아본다. 또 어떤 사람은 밤새 로맨스 소설을 읽는다. 우리는 자신으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해 거의 뭐든지 하려 든다. 하지만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이 모든 회피 시도는 고통을 더 악화시킬 뿐이다. - 신경과학자들은 도파민의 발견과 더불어, 쾌락과 고통이 뇌의 같은 영역에서 처리되며 대립의 메커니즘을 통해 기능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쉽게 말해 쾌락과 고통은 저울의 서로 맞은편에 놓인 추처럼 작동한다.우리의 뇌에 저울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중간에 지렛대 받침이 있는 저울이다. 평소에는 저울 위에 아무것도 없으면 지면과 수평을 이룬다. 우리가 쾌락을 경험할 때..

Review 2023.06.10

밝은 밤

- 마음이라는 것이 꺼내볼 수 있는 몸속 장기라면, 가끔 가슴에 손을 넣어 꺼내서 따뜻한 물로 씻어주고 싶었다. 깨끗하게 씻어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해가 잘 들고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널어놓고 싶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마음이 없는 사람으로 살고, 마음이 햇볕에 잘 마르면 부드럽고 좋은 향기가 나는 마음을 다시 가슴에 넣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겠지. 가끔은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 비가시권의 우주가 얼마나 큰지, 어떤 모습일지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 안에도 측량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테니까. 나는 할머니를 만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사실을 자연스레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지금의 나이면서 세 살의 나이기도 하고, 열일곱 살의 나이기도 하다는 것도. 내게서 버려진 내가 사라..

Review 2023.06.08

책 / 남자들은 머핀을 싫어해

렌은 조난 긴급구조자처럼 섹스를 한다. 그게 마음에 든다. 다시 말해, 섹스가 참으로 섬세하다는 것이다. 섹스 경험은 많지 않지만, '멋진 섹스'는 나이와는 별 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이가 들었는데도 형편없는 섹스를 하는 사람이 있고 젊어도 재능이 있는 사람이 있다. 아무래도 상상력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머리 나쁜 남자와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남자가 멋진 섹스를 할 리 없다. - 다나베 세이코, 중에서

Review 2022.12.30

눈이 내릴 때까지

- 이와코는 오바의 가슴에 꼭 알맞게 파묻혀 늘 감탄한다. '어쩜 이렇게 사람을 안을 수 있을까.' 포옹뿐만 아니라, 입술 위에 따스한 눈처럼 떨어지는 남자의 부드러운 입술도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입술과 꼭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감탄하고 만다. 몸이, 또는 인생의 틀이 잘 들어맞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오바의 몸은 딱딱하지만, 이와코에게는 하나도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팔도 혀도 입술도 한없이 부드러웠다. 남자의 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생명의 매끄러움 그 자체라는 느낌이었다. 몸 자체가 만족의 한숨인 것 같았고 이와코는 그 한숨에 안겨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 언니는 미래의 불안을 강조하지만, 이와코는 옛날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아직도 잘 간직하고 있다. 경리부 남자는 주..

Review 2022.12.30

나는 왜 생각이 많을까

- 실험자의 46.9%는 어떤 일을 할 때 자신의 행독과 상관없는 생각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지금 하는 일과 관련 없는 생각을 할 때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덜 행복하다고 느꼈다. 즉, 눈앞의 일에 집중하지 못할 때는 행복을 느끼기 어렵고 집중할 때는 행복을 느끼기 쉽다는 거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어떤 일에 열중할 때 그 순간에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충족감이 있다. 왜냐하면 어떤 일에 열중할 때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탠퍼드대와 구글이 도입해 화제가 된 '마음챙김명상'은 깊은 호흡에 의식을 집중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써 심신을 정화하는 데 목적을 둔다. '번뇌를 버린다'를 바꿔 말하면 '의식을 지금 눈앞에 있는 것에 집중시키는 것(그러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Review 2022.12.24

사물에게 배웁니다

- 식물에게 완성은 없다. 내가 그리던 목표의 마지막 장면이 실은 구체적이지 않은 것처럼. 그저 매일이 필요하다.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고 물을 때면 언제나 원거리를 멀찍이 쳐다보게 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먼 시선보다는 촘촘한 자각이 더 도움을 준다. 어제와 한껏 달라진 내 모습이 지금의 생활에는 무엇보다도 기념이다.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은 지금에 가까이 눈을 두고 조목조목 들여다보며 그 과정을 만끽하는 일. 조금씩 달라지는 매일의 표정을 알아채고 싶다. 이루고 싶은 장면이 너무 멀어서 쉽게 지치던 시간을 달리 바라보고 싶다. 오늘의 바람에 조금 더 묵직하게 일렁이는 건강한 아보카도 잎처럼. - 임진아, 중에서

Review 2022.12.24

넷플릭스 / 썸바디

1.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완전히 이해받는 세계. 그래서 이 드라마가 어쩐지 나에게는 위로가 되었나 보다. 2. 네이버 블로그에서 발견한 결말에 대한 가장 완전한 해석처럼 느껴지는 댓글 (스포 포함) - 전 해석이 조금 다른데요. 드라마에서 그 썸원이란 프로그램과 여주는 동일시 되는데, 마치 기계가 사람을 배우는 것 같은 상황과 동일시하죠. 맥락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사랑' 입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기계가 배워가는 과정이죠. 마지막 알고리즘을 해석하는 여주에게서 힌트를 얻어요. 엄마가 알려준 두려움 카드에 보면 엄마가 사랑하는 여주를 못보게 되는 것이 두려움이다 라고 정의해 놓았는데 여주는 거기서 자기의 감정을 해석해요. 그러면서 남주의 살인을 이해하게 되요. 살인을 할 때 상대방이 자신을 두려워하..

Review 2022.11.23

책 / 소설 보다: 가을 2022

오랜만에 담백하고 좋은 단편 소설집을 읽었다. 담겨 있는 소설들이 모두 마음에 들었고 인터뷰도 좋았다. - 인터뷰어 : 어쩌면 이 소설은 '정상적인' 삶의 연극성을 과장 없이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맡은 역할과 삶이 분열 없이 대응하는 인물입니다. 대학생 시절 "뭔가 다른게 되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연극 동아리에 가입했지만 비중 없는 대학생 역할만을 연기하게 되었던 것처럼요. 문득 하늘에서 떨어져 전조등을 고장 내는 "군청색 털 고무신"처럼 기이한 조짐이 있지만, 주인공은 그 조짐을 추적하지 못한 채 망각하고 말지요. 주인공은 특별한 사건도 일탈도 없이 살아온 자신의 삶에 공허함을 느끼다가도, 이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충만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충만함까지도 묘하게 연극적이지만..

Review 2022.10.30

힘 빼기의 기술

- 어찌 보면 사랑은 인생의 가장 큰 위로 같다. 종교를 진지하게 믿기엔 과학 서적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사실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세상에 나타난 데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의미를 찾기엔 완벽하게 허무한 삶에서, 한 존재가 다른 수많은 존재 중에 하필 바로 그 단 한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막연하나마 '아,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고 이 세상에 왔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사건이라니, 대단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종교가 주는 위로에 필적하는 위로다. 누가 종교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전능한 신보다는 무능한 인간들 사이의 사랑을 더 믿어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사랑은 인간에게 닥치는 가장 근사한 이벤트이자동시에 가장 크게 배울 수 있는 기회다. '사랑은 개체에서 전체를 발견하는 ..

Review 2022.10.27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

- 양극성 성향이 심한 사람은 몇몇 특징을 나타내는데 네 가지로 압축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식욕이 증가하고 밤에 폭식증이 나타납니다. 탄수화물이나 매운 것을 먹으면 예민함이 줄어들기 때문에 계속 먹게 됩니다. 둘째,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납니다. 셋째, 몸이 무거워 주로 누워 지냅니다. 넷째, 타인에게 거부당하는 데 매우 민감합니다. 거부민감성으로 인해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특히 다른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에 몹시 예민합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의 내용보다는 표정이 어떠한지를 더 중시합니다. 그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지 과하게 생각하고 거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표정이나 말투는 그 당시의 컨디션과 관련이 높습니다. 예를 들어 어제 잠을 못 잤거나 일이 많아서 피곤하면..

Review 2022.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