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건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요.’
이것은 내가 육 년 전 뉴욕 여행에 갖고 갔었던 책의 한 구절이다. 그 책에서 왜 이 부분이 적힌 페이지를 접어놓았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행이란 죽음의 예행연습이라는 어머니의 말은 잊히지 않는다. 그 여행 내내 어머니는 검은색 수첩을 갖고 다녔고 그 안에는 빛바랜 내 신춘문예 당선 기사가 간직돼 있었다. 코니아일랜드에 함께 갔던 여성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 수첩은 이제 내가 갖게 되었다. 이따금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이 뭘까 떠올려볼 때가 있다. 대여섯 살 무렵 어머니와 바다에 같이 갔던 날 이전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도 없다. 어머니의 말대로 아마 더 많은 죽음의 예행연습을 하면 그때에 더 어린 날의 기억이 떠오를 것이다. 그 기억 속에서는 나를 포대기에 안은 젊은 어머니가 아가씨처럼 웃으며 재즈와 올드 팝에 맞춰 춤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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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아가씨 유정도 하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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