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96

고도 자본주의

모든 것은 면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다. 그것이 고도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가장 거액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가 가장 유효한 정보를 입수하며, 가장 유효한 이익을 얻게끔 된다. 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자본 투자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내포한 행위인 것이다. 자본 투자를 하는 자는 그 투자액에 상응한 유효성을 요구하게 된다. 중고차를 사는 사람이 타이어를 발로 걷어차고 엔진을 살펴보고 하듯이, 1천억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는 그 투하의 유효성을 세세히 검토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조작도 하는 것이다. 그 세계에선 공정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기에는 투자 자본의 액수가 너무 큰 것이다. 강압적인 일도 한다. 가령, 토지 매수에 응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자. 예전부터 장사를..

Review 2010.06.20

태엽감는 새

왜냐하면 계시와 은총을 잃어버렸을 때 내 인생 또한 잃어버렸으니까. 예전에 내 속에 있었던 생명이나, 무엇이든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젠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져 버렸소. 저 강렬한 빛 속에서 그것들은 불타 올라 재로 별해 버렸던 것이오. 그 계시와 은총이 발하는 열이 나라는 인간이 지닌 생명의 핵을 모두 태워버렸던 것이오. 그 열에 견딜 수 있는 정도의 힘을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이라오. 그러므로 나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소.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구제라고도 할 수 있소. 그것은 나라는 것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그 암울한 지옥으로부터 나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는 것이오. 또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구려. 용서하시오. 내가 정말로 오카다씨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나는 내..

Review 2009.06.30

한밤중의 기차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와 포옹에 대하여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얼마나 좋아해?"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 밤의 기적소리만큼" 이라고 대답한다. 소녀는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날, 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지."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어. 아마 두 시나 세 시, 그쯤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몇 시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그것은 한밤중이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이고,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알겠니? 상상해봐. 주위는 캄캄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소리라고는 아무 것도 안 들려. 시계 바늘이 시간을 새기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아 ─ 시계가 멈춰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갑자..

Review 2009.02.26

말이 표를 파는 세계

5월 7일 금요일 나는 아버지한테 "저어 아버지,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전부터 그것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한 뒤에, "사람은 죽으면 말이 표를 파는 세계로 가서, 거기에서 말한테서 표를 사서 전차를 타고, 도시락을 먹지. 도시락에는 어묵과 다시마 말이와 양배추 다진 것이 들어있어."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얘기에 대해서 한참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왜 죽은 뒤에 어묵과 다시마 말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다같이 특초밥을 주문해서 먹었었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죽은 사람은 어묵과 다시마 말이와 양배추 밖에 먹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불공평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그렇..

Review 2009.02.26

은희경, 새의 선물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남의 시선을 싫어하게 된 것은. 한동안은 누가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엄마 이야기라고 지레 짐작했으며 남에게 그것을 눈치채이기 싫어서 짐짓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

Review 2008.12.26

11/13 빠에야 믹스타 후기

현대 예술의 중요한 사조 중 하나는 바로 ‘내러티브의 해체’이다. 뚜렷한 내러티브나 주제의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억지로 이해시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이성적인 사유를 강요받는 데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제 예술은 그 어떤 논리적 이해나 정답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공감’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잠시 일상을 잊고서 짜릿한 일탈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는 공연이다. 에서 선보이는 동작들은 낯설고 새로우면서도 동시에 왠지 익숙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것은 이 공연의 안무가 스페인 전통 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스페인 전통 무용이 우리의 전통적 춤사위와 어떤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그러한 전문적인 해설을 차치하더라도 에서 나타나는 ..

Review 2008.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