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자책과 원망의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차츰 이성의 끈을 붙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어떤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구하기 위해 그 구절이 나에게 온 것이다. 나의 어처구니없는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 구절이 나에게 도착한 것이다.
일어날 객관적 사태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은 단지 그 운명을 받아들이는 나의 주관적 태도일 뿐입니다. 나는 다만 내가 어쩔 수 없는 운명 앞에서 나 자신의 주관적 태도를 고상하게 만들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
그렇다.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다. 아무리 원망을 하고 있어봤자 바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나의 바꿀 수 없는 운명이었다. 오직 바꿀 수 있는 건 이 일을 받아들이는 나의 태도였다. 나는 내 여행을 지켜야 했다. 모든 불안과 의심과 절망으로부터 지켜야 했다. 여행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도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내 여행을 박살내버리려 한다는 말인가. 그럴 순 없었다. 그렇게 내버려둘 순 없었다. 다른 누구의 여행이 아닌 나의 여행이었다. 우리의 여행이었다. 우리가 기운을 차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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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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