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96

네 인생의 이야기

- 네 인생의 이 단계에서 네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어. 내가 너에게 젖을 먹이기 전까지 네 안에는 과거의 만족감에 관한 기억도, 미래의 충족에 대한 기대감도 존재하지 않아. 그러다 젖을 빨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역전되겠지. 너는 세상에 대해 아무런 불만도 느끼지 않게 돼. 네가 지각하는 유일한 순간은 오로지 지금뿐이야. 너는 현재 시제 속에서만 살아. 여러 의미에서 실로 부러운 상태라고 할 수 있지. - 미래를 안다는 것과 자유의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나로 하여금 선택의 자유를 행사할 수 있게 한 것은 내가 미래를 아는 것 또한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와는 반대로 미래를 아는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다른사람들에게 털어놓는 행위를 포함해서, 나는 결코 그 미래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미..

Review 2019.09.08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수희 저/서평화 그림 - 나는 원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소설을 읽다가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나오면 신이 난다. 청소를 하고 옷을 다리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요리를 하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어릴 때 읽은 동화책에서도 찬장 위에 놓인 살구절임을 먹을까 말까 계속해서 고민하는 여자애의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만화영화 속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집에서 몰래 훔쳐온 찻잔에 귀한 사탕이니 초콜릿 같은 걸 두고 소꿉놀이를 하던 장면은 아마 할머니가 되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톰 소여가 마시던 유리병에 든 흰 우유도, 하이디가 먹던 검은 빵과 흰 빵도.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하던 초원의 집 소녀들이 머리에 쓴 귀여운 모자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읽거..

Review 2019.08.03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러네이 엥겔른 - 신체 혐오의 위기에 빠진 여성이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첫 번째 반응은 '난 다이어트할 거야. 탄수화물을 줄여야겠어. 매일 운동해야지. 이제 디저트는 안 먹어.'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응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장기적인 관점에서 건강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없다. 두 번째로, 섭식 장애로 이어지는 위험한 행동을 이끌ㅇ낼 수 있다. 왜냐하면 표준 몸매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낄 때 가장 흔한 반응은 깡마른 이상형에 가까워질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기꺼지 하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서적인 고통을 겪을 경우 기분 전환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 설사 그 행동이 잠깐의 기분 전환을 위한 것이더라도 말이다. 이런 기분 전환은 커다란 아이스크림 한 ..

Review 2019.08.03

빵 고르듯 살고 싶다

임진아 저, 중에서 - 손을 깨끗히 하려고 쓰는 비누부터 먼저 씻는 마음. 내 손을 깨끗하게 해주느라 더러운 거품이 묻은 비누를 닦아주는 마음. 이 마음이 필요할때가 분명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것이 언제일지 떠올려보았다. 하나, 늘 말을 잘 들어주는 이에게 습관처럼 내 마음을 늘어놓았던 날. 혹여 내 마음 때문에 친구 마음에 구정물 거품이 묻어 버렸던 건 아닐까? 둘, 스트레스 받은 마음을 스스로 정리하지 못하고 가까운 사람에게 괜히 투정부리며 이상한 방식으로 화를 풀던 날, 나로 인한 더러움은 스스로 닦아낸 후 사람을 대해야 했는데 그게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가까운 사람이니까 이 거품도 이해해주겠지... 하던 이기적인 착각. 비누를 닦아내듯 나를 뱅글뱅글 돌리는 방법을 배우자고 다짐하며 긴 손 ..

Review 2019.06.23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허지원 지음 - 어떤 사람이라도 매일매일 위아래로 끊임없이 요동치는 자존감을 끌어안고 살아갑니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아보이는 사람이라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어떤 날은 자존감이 바닥 끝까지 가라앉는 경험을 하면서도 그저 버티며, 꾸준히, 살아갑니다. - '깨어 있으면서도 아무 일 없이 쉬고 있음'을 뇌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라고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프로이트가 말한 성숙하고 이성적인 에고Ego를 뇌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그것이 바로 휴지기의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와 유사하다 것입니다. 주위 환경을 돌아보고 상황을 예측하도록 뇌를 준비시키되, 쾌락이나 흥분과 관련된 피질 하부의 네트워킹은 조용히 억제하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는, 정말로 에고가 하는 일과 유사하다는 느낌..

Review 2019.06.13

[김하나의 측면돌파] 어쩌라고, 되면 좋고 아님 말고!

팟캐스트 [김하나의 측면돌파] 허지원 임상심리학자 저 인터뷰 방송 - 당신에게 불안감을 가져오는 사건들은 많은 경우 당신의 노력이나 기대와는 상관없이 운과 상황에 의해 좌우됩니다.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당신은 한다고 했습니다. 수백번 무너져내리는 마음을 일으켜가며 어떻게든 끝까지 해보려 했습니다. 당신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운이 나빴을 뿐입니다. 주인공이 당신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내가 아니면 안되는 일 따위는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억지로 만들어 낸 가치가 아니어도 당신과 나는 이대로 충분합니다. 기대하세요. 내일의 날씨. 이따가의 점심 메뉴. 오랜만의 시내 외출. 개봉할 영화와 새로운 드라마. 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힘은 지치지 않는..

Review 2019.05.31

아프다면 만성염증 때문입니다

이케타니 도시로 지음 만성염증을 억제해야 무병장수한다 최근 당뇨병과 치주염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치주 병균이나 치주 병균에 반응해 치아 주변에서 생기는 염증을 일으키는 물질인 메디에이터(mediator. 매개체)가 혈류를 타고 전신을 돌아다니며 혈당치를 낮추는 호르몬인 인슐린의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면역 시스템의 오작동 '메디에이터(mediator)'는 원래 '중재자'라는 의미지만 의학 용어로는 세포에서 세포로 정보를 전달하는 '전달 물질'을 뜻합니다. 간단히 세포가 이래라 저래라 하고 내리는 명령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염증은 원래 몸에 필요한 반응이므로 염증을 일으키는 메디에이터도 필요합니다. 동시에 없애는 메디에이터도..

Review 2019.05.25

배움에 관하여

한 인간으로서의 '나'를 소개한다는 것은 단순한 듯하지만 사실상 참으로 복잡한 일이다. 그런데 한 사람이 씨름하고 있는 물음들, 타자에게 건네는 질문들을 통해서 나는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한 인간으로서의 내면세계의 내음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씨름하고 있는 물음들, 자신이나 이 세계에 던지는 질문들이 그 사람이 '누구인가'라는 '정체성의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 강남순, '배움에 관하여' 중에서

Review 2018.11.26

세상의 모든 ㅂ들을 위하여

세상의 모든 죽음은, 삶의 종결은 슬프고 아프다. 제대로 인사조차 할 수 없었던 갑작스런 이별은 더욱 그럴 것이다. 내가 내 삶의 마지막 모습을 감히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가끔 그려본다. 아주 짧아도 좋으니 안녕이라고, 만나서 정말 좋았다고 웃으며 말을 건넬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역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생의 속성을 보건대 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욕심 같기도 하다. 요즘 부쩍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새삼 어떤 이에게는 허락되고, 어떤 이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이 작별의 인사가 참 아프고 슬프다. 그러니 삶의 모든 순간에서 먼저 손을 내밀고 마주잡으며 안녕이라고 마음을 담아 인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늘 다짐은 앞서고 행동은 느려 후회가 먼저 오지만. 그럼에도. - 엄태주, '세상의 모든 ㅂ..

Review 2018.11.24

크레이빙 마인드 上

보상에 의한 학습은 대강 다음과 같은 과정으로 진행된다. 계기(trigger), 행동(behavior), 보상(reward). 우리는 화가 나거나 슬플 때 아이스크림 또는 초콜릿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사실을 습득한다. 이후부터는 배 속 공복의 신호 대신 감정의 신호('지금 슬프다')를 계기로 음식을 먹게 된다. 행동을 반복하고 습관 고리(habit loop)가 형성된다. 또한, 과거의 행동에 대한 보상과 처벌을 통해 얻은 편견은 우리의 렌즈에 새겨진다. 렌즈는 세상을 바라보는 습관적인 눈이 된다. 초콜릿을 먹었는데 만족스러웠다면 '초콜릿은 좋은 것'이라는 안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이는 그의 입맛을 기준으로 한 주관적인 판단이고 편견이지만, 시간이 흘러 우리는 각자 안경을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

Review 2018.11.17

크레이빙 마인드 中

우리는 욕망의 파도에 올라타는 방법을 배울 수 있다. 첫째, 욕망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편안하게 받아들이라. 욕망이 찾아오는 것은 당신이 통제할 수 없는 일이니 그 파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거나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욕망을 무시하지 말고, 다른 데로 주의를 돌리려고 하지 말고, 그 욕망을 어떻게 하려고 하지도 말라. 그것은 당신의 경험이니까. 당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떤 단어나 문장('좋아, 왔구나', '그렇지' 등)도 좋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행동만으로도 괜찮다. 욕망의 파도를 붙잡으려면 그것이 만들어지는 동안 세심하게 연구하고 조사해야 한다. "지금 내 몸에서 뭐가 느껴지지?"라는 질문을 던지라. 열심히 생각하기보다는, 가장 강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포착하라. 그것이 당신에..

Review 2018.11.17

크레이빙 마인드 下

사실 우리는 별 생각 없이 우리의 도파민 손잡이를 누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우리의 스트레스 나침반은 조정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면 우리가 나침반을 잘못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파민이 분비되는 보상으로부터 멀어져야 하는데 나침반이 우리에게 그런 보상에 다가가는 방향을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슬플 때 달고 부드러운 음식을 먹거나 소셜 미디어를 이용하면 정말로 기분이 좋아지는가? 아니면 결국 더 나빠지는가? 이제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편안하지 않음'과 '강화를 통한 보상'을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손잡이를 누르는 행동을 잠시 중단하고 한 걸음 물러나 실제의 보상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러면 어떤 행동이 우리를 스트..

Review 2018.11.17

소란

앓고 난 뒤 수척해진 얼굴로 맞이하는 새벽, 땀과 소변과 열로 독소를 몽땅 비워내 가벼워진 몸을 느끼는 것은 나쁘지 않다. 새로 살 기운을 담기 위해 빈 항아리처럼 몸을 내놓고 앉아있는 일. 헛헛해진 속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허기와 건강을 돌보겠다는 다짐,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창 밖으로 돌릴 수 있을만큼 넓어진 마음.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 평화로운 얼굴. 이 모든 것이 '새것'을 데려다준다. 실컷 아프고 난 당신이 파리해진 새 얼굴과 막 태어난 '작은 의욕'을 가지고 창밖을 내다볼 때 산다는 것은 '의지를 갖고' 산다는 것임을 깨닫는다. 아프다는 것은 이겨내야 할 것이 아니라 지혜롭게 겪다,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다음 새로워지는 것은 선물 같은 일. 그러나 누구도, 너무 많이는 아프지 않았으..

Review 2018.10.15

헌등사

"아 이제 돌아가야 해."마리카는 일어나서 구겨진 상의를 무리하게 입고, 춥지도 않은데 버튼을 아래부터 목까지 하나도 잊지 않고 채우고, 짧은 시간에 완전히 원래대로 딱딱해진 구두를 신고서는"그럼 또 봐. 또 오고 싶은데, 만약 가능하다면, 정말로 금방, 또, 오고 싶은데, 그렇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조만간."이라고 입에 낸 말, 내지 모한 말, 많은 말들에 부대끼면서, 몸을 메모용지처럼 그 자리에서 뽑아내 마구 주물러버리듯이 걷기 시작한다. 눈물로 젖은 얼굴은 엉망진창이었고, 목소리는 나오기 전부터 잠겼다. - 다와다 요코, 중에서

Review 2018.08.11

리틀포레스트

도시 밖에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여유, 그걸 부러워해야 한다는 노골적인 권유. 지쳐있던 나에게는 위로가 아닌 상대적 박탈감을 준다. 킨포크 페이지를 넘기면서 느끼곤 하는 헛헛함. 지나치게 욕심 부린 듯한 그림같이 예쁜 장면들. 혜원의 여유는 내게 가장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정성껏 꾸며진 카페, 소박하거나 화려한 골목길들, 평일 연차를 쓰고 누려보는 여유, 한강 밤 산책.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로서는 이런 것들이 안식처이다. 그런 위로에 기대어 살아가는 것도 충분히 괜찮다. 괜찮아야만 하고.

Review 2018.03.13

기사단장 죽이기

- 전화를 끊고 세면대로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나 자신의 얼굴을 정면에서 똑바로 쳐다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그저 물리적인 반사일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 비친 내 얼굴은 어디선가 둘로 갈라져 떨어져나간 내 가상의 분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였다. 물리적인 반사조차 아니었다. - 이튿날 다섯시 반에 절로 눈이 떠졌다. 일요일 아침이다. 주위는 아직 캄캄했다. 부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고 작업실로 갔다. 동쪽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와 불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어 차갑고 신선한 아침공기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새 캔버스를 꺼내 이젤에 얹었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밤사이 내린 비로 주위 ..

Review 2017.12.31

골목바이골목, 김종관

-내가 산책하는 조용한 골목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성장을 하고, 살고, 늙는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며 세상을 넓히는 시절로 떠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와 늙어가는 이들도 있다. 노인들은 어릴 때 처럼 자신의 세상을 골목 안으로 축소시킨다. 볕이 드는 자리에 의자를 두고 조용히 앉아 지나가는 산책자를 지켜본다. 노인과 골목을 뒤로 하고 산책자인 나는 이 작은 여행에서 더 넓은 항로를 꿈꾼다. 누군가가 성장을 하고, 살고, 늙는 타국 혹은 도시에서 아이와 노인을 만나고 그들을 기억한 채로 나의 골목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까운 곳에서 낯섦을 찾고 먼 곳에서 익숙함을 찾는 여행을 끝내고 언젠가 내 자리로 돌아온다면 볕이 드는 자리에 책상을 두고 여행에서 가져온 좋은 문장들로 이야기..

Review 2017.09.15

2017 트렌드노트

-어떻게 들여다볼 것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 시각의 변화, 관점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겠다.우선 용어부터 바꿔보자. '소비자', '고객', '국민'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다. 사람들은 소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물건을 사는 고객과 경쟁사 물건을 사는 비고객으로 나뉘지 않는다. 시민이기 이전에 개인이며, 때에 따라 어떤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다. 어느 월요일 아침 9시에 편의점에 들러 별사이다를 사 마신 김씨를 이해하기 위해 '왜 달사이다를 사지 않고 별사이다를 샀는가?'를 붇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왜 우유가 아닌 사이다를 샀는가?', '광고에 영향을 받았는가?', '다른 사람에게 별사이다를 추천할 의향이 있는가?'는 적절한 질문이 아니다. ..

Review 2017.0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