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사단장 죽이기

유연하고단단하게 2017. 12. 31. 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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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를 끊고 세면대로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내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나 자신의 얼굴을 정면에서 똑바로 쳐다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그저 물리적인 반사일 뿐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그곳에 비친 내 얼굴은 어디선가 둘로 갈라져 떨어져나간 내 가상의 분신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내가 선택하지 않은 나였다. 물리적인 반사조차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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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다섯시 반에 절로 눈이 떠졌다. 일요일 아침이다. 주위는 아직 캄캄했다. 부엌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고 작업실로 갔다. 동쪽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와 불을 끄고 창문을 활짝 열어 차갑고 신선한 아침공기를 맞아들였다. 그리고 새 캔버스를 꺼내 이젤에 얹었다. 창밖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밤사이 내린 비로 주위 수목은 흠뻑 젖어 있었다. 비는 조금 전에 그쳤고 여기저기 구름 사이로 빛나는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는 스툴에 앉아 머그잔에 담긴 뜨거운 블랙커피를 마시면서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눈앞의 캔버스를 잠시 바라보았다. 이른 아침, 아직 아무 것도 그리지 않은 새하얀 캔버스를 바라보는 것이 예전부터 좋았다. 나는 그것에 개인적으로 '캔버스 참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직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지만 결코 공백이 아니다. 그 새하얀 화면에는 와야 할 것이 가만히 모습을 감추고 있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몇 가지 가능성이 존재하고, 이윽고 하나의 유효한 실마리를 향해 집약된다. 나는 그런 순간이 좋았다. 존재와 비존재가 조금씩 섞여드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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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있지, 제일 굉장한 건, 거기가 더이상 깜깜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깜깜하다는 거야. 빛이 없어지면 어둠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깜깜해. 그리고 그 어둠 속에 혼자 있으면, 내 몸이 점점 풀어져서 사라지는 기분이야. 하지만 깜깜하니까 내 눈에는 안 보여. 몸이 아직 남아있는지 아닌지 벌써 없어졌는지도 알 수 없어. 그래도 말이야, 만약 내 몸이 전부 없어졌다고 해도 나는 분명히 거기 남아 있는 거야. 체셔 고양이가 사라져도 웃음은 남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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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네요." 마리에가 말했다.
"그런 날도 있어." 내가 말했다. "시간이 빼앗아가는 게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가져다주는 것도 있어. 중요한 건 시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일이야."



무라카미 하루키, <기사단장 죽이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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