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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산책하는 조용한 골목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성장을 하고, 살고, 늙는다.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접어들며 세상을 넓히는 시절로 떠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다시 그 골목으로 돌아와 늙어가는 이들도 있다. 노인들은 어릴 때 처럼 자신의 세상을 골목 안으로 축소시킨다. 볕이 드는 자리에 의자를 두고 조용히 앉아 지나가는 산책자를 지켜본다. 노인과 골목을 뒤로 하고 산책자인 나는 이 작은 여행에서 더 넓은 항로를 꿈꾼다. 누군가가 성장을 하고, 살고, 늙는 타국 혹은 도시에서 아이와 노인을 만나고 그들을 기억한 채로 나의 골목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까운 곳에서 낯섦을 찾고 먼 곳에서 익숙함을 찾는 여행을 끝내고 언젠가 내 자리로 돌아온다면 볕이 드는 자리에 책상을 두고 여행에서 가져온 좋은 문장들로 이야기를 만들어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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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주보다
그는 전망이 좋은 곳에서 태어났다. 도시를 내려다보고 자랐다. 도시의 전망을 아래에 두고 사는 것은 부자들만이 아니다. 부자들이 높이 살듯 가난한 사람들도 거주지를 높은 곳에 만든다. 그는 마을버스조차 오르기 싶지 않은 곳, 가난한 촌락에서 자랐다. 얼기설기 지어진 판잣집들이 있고 방에 누워 잠을 청하는 밤이면 이웃집 숨결이 벽 너머도 들린다. 그는 성장의 시기, 숱한 아픔이 찾아올 때마다 그 동네의 가장 높은 곳을 찾았다. 슬레이트 지붕 너머, 포근한 도시의 불빛을 감상했다. 어느 밤, 취한 아버지가 어머니의 뺨을 때렸을 때, 그는 다시 높은 곳을 찾았다. 야산 철조망에 매달려 가난한 지붕들 너머 도시의 불빛들을 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어느 자리, 그가 도시라고 믿는 가장 가까운 부근에 양복 입은 남자가 홀로 서서 담배를 태우는 것이 보였다. 그저 사람의 형태 뿐이었음에도 서로가 전망을 즐기는 중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학교를 졸업하고 그 동네를 벗어났다. 불빛 속으로 달려들어 스스로의 궤도를 바꾸고자 노력했다. 여러 번의 시도가 있었고 약간의 성공과 그보다 더 많은 실패가 있었다. 그는 자연스레 나이가 들었다.
그는 어느날 택시를 타고 남산 소월길을 오르다 중간에 내렸다. 누구나 그러한 때가 있듯, 그가 만들어가는 궤도가 뒤틀리는 시기였다. 그는 여전히 전망을 즐기는 습관이 있었고 차에서 내린 그의 눈 앞에 해질녘의 전망이 있었다. 그는 멀게 주택가를 마주보고 있었다. 낮은 이내 밤으로 바뀌었다. 빛이 있던 자리에 어둠이 차고 다시 작은 빛들이 하나둘 눈을 뜨는 시간이었다. 멀리 보이는 불빛들은 마치 스스로만을 비추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빛들은 무언가를 비추고 있고 비추는 범위는 저마다 다르다. 어떤 빛은 강하고 어떤 빛은 화려하다. 또 어떤 빛들은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눈으로 작은 범위의 빛들을 좇았다. 가난한 집들에 눈이 머물렀고, 이미 재개발이 되어 사라진 그의 옛 공간을 떠올렸다. 저 멀리 가로등이 하나 더 켜졌고 그 불빛 너머에 그와 마찬가지로 전망을 즐기는 사람이 보였다. 아직 성년이 아닌 작은 몸이었다. 소년은 언덕 너머 비탈을 따라 둘러쳐 있는 철조망에 기대어 서서 조용히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는 전망의 한 귀퉁이, 작은 불빛에 감싸인 소년을 바라보며 담배를 태웠다. 낡은 양복 바지에 재가 들러붙었다.
김종관, <골목바이골목>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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