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한수희 저/서평화 그림
-
나는 원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소설을 읽다가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나오면 신이 난다. 청소를 하고 옷을 다리고 냉장고를 정리하고 요리를 하는 이야기들. 그런 이야기를 읽고 있으면 이상하게 안심이 된다. 어릴 때 읽은 동화책에서도 찬장 위에 놓인 살구절임을 먹을까 말까 계속해서 고민하는 여자애의 이야기가 유독 기억에 남는다. 만화영화 속 빨강머리 앤과 다이애나가 집에서 몰래 훔쳐온 찻잔에 귀한 사탕이니 초콜릿 같은 걸 두고 소꿉놀이를 하던 장면은 아마 할머니가 되어도 잊지 못할 것이다. 톰 소여가 마시던 유리병에 든 흰 우유도, 하이디가 먹던 검은 빵과 흰 빵도.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하던 초원의 집 소녀들이 머리에 쓴 귀여운 모자도 잊지 않고 있다. 그런 이야기를 읽거나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고, 지금 떠올려도 마찬가지로 그렇다.
직업상 출근을 하지 않고 매일 집에서 일하고 집 주변을 산책하고 집에서 쉬는 나는 그렇게 시시콜콜한 일들로 하루를 채운다. 아침마다 창을 열어 환기를 하고 식탁 위를 깨끗이 치우고 설거지는 미루지 않으며 늘 빨래를 빨고 말리고 갠다. 화분에 물을 주고 커피를 갈아 내려 마시고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언제나 식사는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그런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산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의심이 들 때도 있다. 시시콜콜함에의 집착은 어쩌면 퇴행이 아닐까. 진짜 어른이라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닐까. 나는 매일매일의 쳇바퀴를 돌리느라 정작 중요한 것은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건 세상이야 어떻게 돌아가든 나만 근심걱정 없이 잘 살면 그만이라는 무책임한 태도가 아닐까.
인생은 무자비하다. 그런 것을 이제 40대에 접어든 나는 자연스럽게 깨달아가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늙고 병들고 예기치못한 불행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한때는 당연했던 모든 것을 잃어간다. 그걸 깨달아버린 마음은 쓸쓸하다. 이 와중에 매일 더러워져도 매일 청소하고, 매 끼니를 차려 먹고 또 다음 끼니를 준비한다.
-
모두가 다 근사한 아파트에 살 수는 없어.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야. 오래되고 낡고 좁은 집에 살아도 그 집을 자기 취향에 맞게 잘 꾸미고 가꾸면 괜찮아. 집은 네 몸을 담는, 네 하루하루가 만들어지는 공간이야. 하찮게 취급할 수는 없지. 이런 집에서도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고 사람들과 어울리고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매일을 충실하게 살아나갈 수 있어.
-
거대한 것과 시시콜콜한 것을 동시에 바라보며 살고 싶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책임해지지 않으면서 하루하루의 생활도 잘 살아나가고 싶다.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매일매일 만족스럽게 잠자리에 들고, 또 새것 같은 하루를 기대하면서 눈을 뜨고 싶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그렇지 않은 날도 있다. 좋은 날을 즐기는 법과 그렇지 않는 날을 견디는 법을 배우며 살아가는 것이다.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네 인생의 이야기 (0) | 2019.09.08 |
---|---|
ANNA (0) | 2019.08.29 |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0) | 2019.08.03 |
빵 고르듯 살고 싶다 (0) | 2019.06.23 |
나도 아직 나를 모른다 (0) | 2019.06.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