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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와 수잔

- 글은 음식과 음료야. 에드워드가 말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모든 게 죽기 때문이야. 죽는 것들을 구하기 위해서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이 불분명한 혼란 덩어리이기 때문이야. 그 혼란 덩어리는 단어를 써서 지도를 그리기 전까지는 제대로 볼 수 없지. 우리의 눈은 침침하니 잘 보이지 않지만 글을 쓰면 안경을 쓰고 보는 것과 같아. 아니, 글을 쓰는 이유는 읽고 내 삶에 있는 이야기들을 나에게 맞춰 쓸 수 있도록 다시 만들기 위해서야. 글을 쓰는 이유는 내 마음이 횡설수설 떠들어대기 때문이야.

Review 2017.03.11

170311

사귄지 6년차에 접어들 무렵부터 우리의 관계에는 이별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나를 향한 사랑이 그렇게 컸다는 말이 새삼스럽고 고마웠다. 또 그런 만큼 사랑의 무게가 줄어들기 시작했을 때 당혹스러웠다는 그 말이 슬펐다. 사랑하지만 예전만큼 사랑하지 않는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그에게 더 이상 우리 관계의 미래를 장담할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작은 일탈이 있었다는 것, 그러니 헤어지는게 좋겠다는 말까지 듣고서도 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지난 일요일 그가 그렇게 고백한 이후 나는 진짜 헤어짐을 준비하기로 했다. 의심 없이 그 사람에게 기대었던 마음을 서서히 떼어내기 위해서 먼저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나 헤어졌어 라고 소리내어 말했다. 그건 난 이미 헤어진 거나 마찬가지라고..

Diary 2017.03.11

정세랑, 피프티피플

- 그날밤 혁현은 거의 자지 못했다. 천재소녀가 아침을 사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술이 8시에 시작인데 7시 반이라니. 물론 바빠서겠지만 선 긋기가 아닐까. 빵 쪼가리나 먹고 빨리 헤어지자는 그런 이야긴가. 도넛을 좋아하는 것인가. 혁현을 싫어하는 것인가. 도넛을 좋아하며 혁현을 싫어할 수도 있다. 가슴이 거대한 도넛에 눌리는 듯해 얕게 잠들었다.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니 아침이었다. 안 그래도 별로 잘생긴 얼굴을 보니 처참했다. "여기 사람 없죠?" 당직실에 있다 온 건지, 집에 있다 온 건지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천재소녀가 먼저 커피를 마시며 혁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곳을 골랐다니, 역시 부끄러운 건가 싶어 혁현은 다시 발바닥에 땀이 났다. "도넛의 시대가 끝난 것 같아요. ..

Review 2017.03.05

2017년 3월 첫째주의 주말.

2017년 3월 첫째주 주말의 기록. 1. 먹은 것 : - 토요일 점심. 부암동 데미타스에서 찹스테이크 덮밥과 크림카레라이스. 기다리고 주문하는데 한시간, 먹는데 30분이 걸렸다.- 토요일 간식. 에스프레소하우스에서 미지근한 맛의 아이스라떼. 너무 피곤해서 저녁에 영화를 보는 동안 잠들지 않기 위해 올리브영에서 산 아쌈 밀크티.- 토요일 저녁. 금호동에 새로 생긴 칵테일바 목화다방에서 오일파스타와 올리브, 칵테일. 가게 이름과 장소성에 반해 마음에 두고 있다가 찾아간 곳인데, 다시 찾아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토요일 야식. 메추리알 장조림. 쳐묵쳐묵.- 일요일 아침. 자몽 하나와 아몬드라떼.- 일요일 점심. 블루베리와 닭가슴살 각각 한그릇, 코코아.- 일요일 간식. 오렌지와 돌체구스토 캡슐 카페오레,..

Diary 2017.03.05

맨체스터 바이 더 씨

삶이라는 건 공기처럼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동일하게 주어진다. 세상은 그 자체로는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다. 하지만 단지 운이 나쁘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잔인하다. 알콜 중독이었던 패트릭의 엄마도, 한 순간에 가족을 잃은 랜디도, 아버지를 떠나보낸 패트릭도 모두 과거를 딛고 나아가지만 리는 엔진이 멈춘 보트처럼 어디에도 나아가지 못한다. 그리고 누구도 그에게 감히 나아가라고 할 수 없다. 어떤 고통은 너무나 커서 삶을 통째로 잠식해 버린다. 시간이 고통을 지워주지도 않고 그 어떤 방식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도 리는 보스턴의 방에 새로운 소파를 사 둘 것이다. 그의 방에 누군가의 온기가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겨울이 지나면 언 땅이 녹고, 조금씩 따뜻해지는 햇살에는 생명력과 위로가 깃들기도 하니까.

Review 2017.02.25

170218

내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인지 생각한다. 나는 왜 나 스스로를 이렇게 망가뜨려야 했나. 나는 닳기 위해 살아가는 걸까. 지금 나는 스스로에게 느껴지는 연민과 혐오의 감정을 곰곰이 헤아려본다. 모든 일은 한 순간에 갑자기 잘못되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복선이라는 게 있다. 작은 일이 조금씩 어긋나고, 간과하다 더 큰 사고를 맞닥뜨리게 된다. 나는 이미 몇 년 전부터 내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왔다. 진단할 수는 있지만 치료할 수는 없다. 고삐를 쥔 손에 힘을 푸는 순간 멈출 수가 없어진다. 나는 후회할 걸 알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파괴적인 순간들이 반복적으로 하루를 갉아먹고 주말을 잠식하고 몇 년 간의 세월을 허송으로 만들어 버린다. 스무살 언저리의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 누운 채 골반 뼈를 만지는 것..

Diary 2017.02.19

170208

일을 하다 보면 뭐가 맞는 거고 뭐가 틀린 건지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그 때 그 순간 내 기준으로는 부당하다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그에 따라 행동한 것인데, 이상하게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내가 틀리고 내가 잘못했다고 말한다. 생각해보면 사회 생활을 잘한다는 건 그때 그때 상황에 맞추어 태세 전환을 잘 하는 것이다. 언제 어디에서든 똑같은 나로서 말하고 행동하는 건 스스로에게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결코 사회생활을 잘 하는 법은 못 된다. 사회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란 언제 어떤 칸에 놓이더라도 제법 그럴 듯한 퍼즐 조각같은 사람이다. 쓸 데 없어진 조각을 버리는 건 오직 그 한 개의 조각에 대해서만 불행일 뿐이다. 그러니 고장이 나지 않기를 염원하면서 나의 유연성을 최대한 개발하..

Diary 2017.02.08

씬짜오, 씬짜오

1. 독일에서의 일은 이제 뿌연 유리창으로 보는 바깥 풍경처럼 희미하다. 그런데도 처음 투이네 집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리면 그때 느꼈던 감정이 생생히 되살아난다. 투이네 식구 모두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던 일, 그 환대에 기뻐하던 엄마의 모습, 어떤 조건도 없이 받아들여졌다는 따뜻한 기분과 우리 두 식구가 같은 공간에 모여 음식을 나눠 먹던 공기를 기억한다. 어떻게 그렇게 여러 사람의 마음이 호의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고작 한 명의 타인과도 제대로 연결되지 못하는 어른이 된 나로서는 그때의 일들이 기이하게까지 느껴진다. 2. "미안해." 나도 모르게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내가 오래도록 그 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했다는 걸 깨달았다. 투이의 커다란 눈이 한 번 깜빡였다. 바람이 불 때..

Review 2017.01.22

또오해영

요새 추운 날씨와 불규칙한 생활과 오랜 친구들과의 얕은 우정을 확인한 데서 얻은 상실감과 여러가지 스트레스가 겹쳐 의도치 않게 방콕생활에 빠져들게 되었다. 인스턴트 음식과 드라마 다시보기에서 위로를 얻는 방콕 생활로 인해 몸뚱이는 포동포동해졌고 그럴수록 쇼핑도 나들이도 흥미가 없고 방콕 외에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없는 악순환에 빠져 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요새는 명작이라 추천받은 한드를 매주 하나씩 정복하는 중이다. 지난 주 내내 폐인같이 끼고 살았던 드라마는 시그널인데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캐릭터에 있다. 이재한과 차수현을 앓으면서 허우적거리다가 이번 주에는 또오해영에 빠졌다. 또오해영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서현진이다. 다른 드라마에서의 서현진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오해영으로서의 서..

Review 2017.01.20

최은영, 쇼코의 미소

쇼코는 판탁스 카메라에 필름을 넣어서 수박을 먹고 있는 우리 세 사람의 얼굴을 찍었다. 뿐만 아니라 저녁을 준비하는 엄마, 거실을 청소하는 할아버지를 파파라치처럼 찍어댔다. 엄마와 할아버지는 곤혹스러워하면서도 그런 관심이 싫지 않다는듯 웃어넘겼다. 눈을 반짝이며 웃는 엄마와 말이 많은 할아버지는 내가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이런 사람들을 바깥에서 만났다면 나는 주저 않고 좋은 어른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와 할아버지는 늘 무기력했고 사람을 사귀는 일에 서툴렀다. 나는 엄마와 할아버지를 작동하지 않아 해마다 먼지가 쌓이고 색이 바래가는 괘종시계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었다. 변화할 의지도,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그 자리에서 멈춰버린 사람들이라고. 가족은 언제나 가장 낯선 사람들..

Review 2017.01.08

다와다 요코, 용의자의 야간열차

이 소설을 통해 다와다 요코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등극! 그녀의 문장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이리저리 뻗어나간다. '용의자의 야간열차'를 읽는 동안 나는 당신이 되고, 남자이기도 여자이기도 한, 영원한 야간열차의 승객이 된다. - 역 분위기가 뭔가 심상찮다. 플랫폼에 이상하게 사람이 적다. 게다가 역무원들이 왠지 소란스러운 게 무슨 비밀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역무원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뭣하니, 그저 묵묵히 관찰할 수밖에 없다. 역 전체가 가면을 들쓰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벗겨내지 못한다. - "버스는 어딨나요, 파리행이오." 역무원에게 몰아대듯 묻자, "대합실에서 기다리세요." 라고 사무적으로 대꾸하며 뿌리쳤다. 들어본 적도 없는 역 이름이었다. 주위는..

Review 2017.01.07

에브리맨, 필립 로스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Review 2016.12.18

가는 비 온다, 기형도

간판들이 조금씩 젖는다 나는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둥글고 넓은 가로수 잎들은 떨어지고 이런 날 동네에서는 한 소년이 죽기도 한다. 저 식물들에게 내가 그러나 해줄 수 있는 일은 없다 언젠가 이 곳에 인질극이 있었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지금은 한 여자가 그 집에 산다 그 여자는 대단히 고집 센 거위를 기른다 가는 비......는 사람들의 바지를 조금 적실 뿐이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의 음성은 이제 누구의 것일까 이 상점은 어쩌다 간판을 바꾸었을까 도무지 쓸데없는 것들에 관심이 많다고 우산을 쓴 친구들은 나에게 지적한다 이 거리 끝에는 커다란 전당포가 있다, 주인의 얼굴은 아무도 모른다. 사람들은 시간을 빌리러 뒤뚱뒤..

Review 2016.12.11

밤 눈, 기형도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Review 2016.12.10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걱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수 없는 일이 있다. 가끔씩 어둡고 텅 빈 방에 홀로 있을 때 그 기타에서 아름다운 소리가 난다. 나는 경악한다. 그러나 나의 감각들은 힘센 기억들을 품고 있다. 기타 소리가 멎으면 더듬더듬 나는 양초를 찾는다. 그렇다.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가끔씩 어둡고 텅 빈 희망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 이상한 연주를 들으면서 어떨 때는 내 몸의 전부가 어둠 속에서 가볍게 튕겨지는 때도 있다.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는 푸른 색이다. 어떤 먼지도 그것의 색깔을 바꾸지 못한다.

Review 2016.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