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문장은 예측할 수 없는 곳으로 이리저리 뻗어나간다. '용의자의 야간열차'를 읽는 동안 나는 당신이 되고, 남자이기도 여자이기도 한, 영원한 야간열차의 승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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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분위기가 뭔가 심상찮다. 플랫폼에 이상하게 사람이 적다. 게다가 역무원들이 왠지 소란스러운 게 무슨 비밀이라도 감추고 있는 것 같다. 역무원을 불러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뭣하니, 그저 묵묵히 관찰할 수밖에 없다. 역 전체가 가면을 들쓰고 있지만, 당신은 그것을 벗겨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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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는 어딨나요, 파리행이오."
역무원에게 몰아대듯 묻자,
"대합실에서 기다리세요."
라고 사무적으로 대꾸하며 뿌리쳤다. 들어본 적도 없는 역 이름이었다. 주위는 캄캄하고 가로등도 없다. 인가도 거의 없는 지역일지 모른다. 하는 구 없이 대합실로 들어갔는데, 그곳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뜨거운 조명이 반사되어 카운터와 테이블 가장자리가 은빛으로 반짝거리고, 젊은이들의 온갖 빛깔의 배낭이 바닥을 가득 메우고, 기타를 치며 읊조리듯 노래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뚝잠을 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높은 천장에는 담배연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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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테이블 위에 놓인 간단한 메뉴판에 크루아상과 카페오레, 아침식사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아침을 먹고 싶어졌다. 아직 아침도 아니고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아침식사를 먹는다는 생각만으로도 새벽 기분이 느껴지는 듯했다. 어찌된 영문인지 가격이 몹시 비싸다. 내일과 모레 쓰려고 바꿔온 프랑이 이걸로 거의 다 사라져버린다. 주문을 받으러 온 웨이트리스가 당신에게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본 당신은 이건 혹시 사기가 아닐까, 열차에서 내리게 해서 비싼 요금을 치르게 만들고, 그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땅에 내동댕이치는 건 아닐까 하는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곧바로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라며 마음을 돌렸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지 몰라 남을 쉽게 의심하게 됐을 뿐이다. 운명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속을 리가 없겠지.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이제 곧 프랑스 국경이니 내리라는 말을 들었는데, 이곳이 이미 프랑스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그런 걸로 골치를 앓아본들 아무 소용 없다. 당신은 크루아상과 카페오레의 맛에 몹시 감탄해서 비싸도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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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담요로 탐욕스럽게 몸을 휘감았다. 절반으로 토막난 잠을 이 차량에서 사들였다. 새벽 네시에는 따뜻한 잠자리와 이별하는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그런 괴로운 상황을 피하려고 늘 빈틈없이 계획을 세우고 시간에 맞추려 애를 썼는데, 왜 이런 꼴을 당해야 한단 말인가. 당신은 밤을 절단당하는 게 끔찍이 싫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운명을 눈앞에 맞고 보니 신선함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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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이라기보다는 한밤중에 잘츠부르크에 도착해 열차에서 내렸다. 범죄의 냄새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벌써 일하러 나가는 노동자의 숨결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춥다. 당신은 외투 앞섶을 목을 조를 듯이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낯선 시간 속으로 던져졌다. 출발점과 도착점은 그대로인데, 그 사이의 시간과 공간이 꾸깃꾸깃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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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 역에 도착한 때는 이른 아침이었고, 밤에 푹 젖은 무거운 몸을 이끌며 당신과 함께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그 밖에도 분명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플랫폼에 서서 옷깃을 추스르며 사방을 둘러보니, 사람들은 어느새 냉랭한 새벽 공기 속으로 빨려들듯이 사라지고 없었다. 모래색 살갗의 건물, 그 자리에 안 어울리게 큰 소리로 지저귀는 작은 새들의 합창, 역에서 나온 당신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맞은 편에서 누가 오면 길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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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밋밋하고 얕았다. 당신은 잠의 시야의 테두리가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 눈을 떴다. 창에 쳐둔 커튼을 살며시 걷고 밖을 내다보니, 일직선으로 뻗은 지평선이 주홍빛으로 물들고 나무 실루엣이 늘어서 있었다. 맞은편 침대에서는 러시아 부인이 벌써 옷을 차려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홍차를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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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안 돼, 어디선가 안 돼, 안 돼 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선을 넘으면 안 돼, 곤란해, 멈춰, 다시는 되돌릴 수 없어, 일단 해버리면 이미 늦으니까 아슬아슬한 순간에 멈춰, 그렇게 말하는 이성의 목소리에 대항해서 융합의 매혹이 의지를 무디게 만들며 괜찮아, 괜찮아 라고 속삭인다. 그대로 몸을 맡겨도 돼, 그대로 흘러가, 흘러가게 놔두고 가는 데까지 가버려, 어차피 자기 의지로는 어쩔 수 없으니까, 기분이 좋으면 그만이니까, 그냥 거스르지 말고 스르르.
당신은 눈을 번쩍 떴다. 어두운 천장이 눈 바로 위에 있다. 차체가 덜컹덜컹 흔들리는 소리, 선로와 기차 바퀴의 마찰음. 화장실에 가고 싶다. 시계를 보니 새벽 두시 반이었다. 아침까지는 아직 시간이 꽤 남았다. 성가셔도 일어나서 갈 수밖에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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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때 문득 여자의 손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손톱이 3, 4센티미터나 길어 있었다. 구부러지고 비틀리고 때가 끼고 희미하게 매니큐어 흔적이 남아 있어서, 아이들 그림책에 나오는 마녀의 손톱 같았다. 벡 씨는 그 손톱을 본 순간 갑자기 안도했다. 언뜻 보기에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던 여자의 겉모습에 벡 씨는 휘말려버렸지만, 막상 여자의 평범하지 않은 부분을 발견하고 나니 불안에서 해방되었다. 나는 평범하고, 상대는 평범하지 않다는 마음이 갑자기 든 것이다. 그것은 이 여자의 불안이지 나의 불안이 아니다. 이 여자가 살해당할 거라는 말은 망상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그것은 이 여자의 문제이고, 그것은 이 겉모습, 새처럼 손톱을 기른 이 여자의 육체에 들러붙은 사건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열차가 급브레이크를 걸며 역에 정착했다. 아직 역은 아니었다. 여자는 핸드백을 품에 끌어안고, 연극이 끝난 극장을 떠나듯 홀연히 일어서더니 작별인사도 없이 객실에서 뛰어나갔다.
벡씨는 그후로 일단 상대의 세세한 부분을 관찰하게 되었다. 그 여자도 전체적으로는 말끔한 차림새였지만 손톱만 이상했다.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머리를 단정하게 매만진 신사라도, 열차에서 마주앉아 있다보면 몹시 불안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세세한 부분을 찬찬히 관찰해보면, 상대의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거나 한다. 옷깃에만 까맣게 때가 탔을 때도 있다. 그걸 발견한 순간에는 흠칫 놀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발견한 것을 지긋이 바라보다보면, 머지 않아 불안이 그 자리에 깃들면서 자기 안에서 멀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야간열차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눈에 흡혈귀임을 알아챌 수 있는 상대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다. 오히려 마魔는 세세한 부분에 깃든다고 벡 씨는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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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츠는 히틀러가 한때 독일 제국의 수도로 삼으려고 생각한 고장이다. 지금은 오스트리아의 소도시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그런 얘기를 듣고 도시의 주변 경관을 빙 둘러보니 역시나 잠든 사이 기와가 입술 위에 올라앉은 것처럼 묵직한 기분이 들었다.
좁은 이마에 우울해 보이는 주름을 새기고, 충혈된 탁한 눈으로 원망스러운 듯이 이쪽을 노려보는 남자 같은 도시. 골격은 탄탄하지만, 키에 비해 어깨 폭이 너무 넓어 팔근육이 묵직하게 매달려 있다. 아니, 이건 좀 지나친가. 당신은 린츠를 그렇게 싫어하지는 않는다. 눈을 반짝이며 현대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빨려들듯이 당신의 춤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이 고장에 많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부터 야간열차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이 도시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정체 모를 무언가에 삼켜지는 건 아닐까 불안해진다.
빈에서 출발한 야간열차는 열시 반이 넘어야 이곳에 도착하고, 당신은 그때까지 이곳에서 시간을 죽여야 한다. 시간을 죽인다는 말은 얼마나 끔찍한 표현인가. 마치 시간이 파리라도 되는 것 같다. 시간파리라는 종류의 파리가 있다. 타임 플라이스 라이크 언 애로Time flies like an arow. 시간은 화살처럼 날아간다. 쏜살같이. 이 문장을 컴퓨터 번역기에 돌리면, '시간파리들은 화살을 좋아한다'는 번역문이 나온다는 얘기를 어제 막 읽은 참이었다. 그러나 야간열차를 기다리는 동안에는 시간이 화살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파리처럼 날아가버리지도 않는다. 정말이지 완전히 반대로, 달팽이 같다.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는 번들거리는 한 줄기 선이 남는다. 그것을 만져보면 끈적끈적할까. 선로처럼 배후에 궤적을 남긴다. 달팽이는 전철의 일종일까. 머리에 안테나 두 개가 뻗어 있어 멀리 있는 누군가와 통신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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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몇 루피 주실거죠?" "실은 루피는 없어요."
"네?"
"그 대신 열차표가 있어요. 그렇지만 이건 보통 차표가 아니에요. 부적 같은 겁니다. 이걸 지니고 있으면, 계속 철도를 타고 다닐 수 있죠."
"계속이라니, 언제까지요?"
"이 여행이 끝나면, 곧바로 다음 여행이 찾아옵니다. 그게 끝나면 또 바로 다음 여행이 시작되죠. 그렇게 끊임없이 여행이 계속되는 겁니다."
그날 나는 당신에게 영원한 승차권을 내주고, 그 대신 자신을 자신으로 여기는 뻔뻔한 넉살을 사들여 '나'가 되었다. 당신은 더이상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지 않게 되어, 언제나 '당신'이다. 그날 이래로 당신은 줄곧 묘사되는 대상對象이 되어, 2인칭으로 열차를 탈 수밖에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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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동안에는 우린 모두 혼자잖아요. 꿈속에는 창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도, 출발지에 남겨진 사람도,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버린 사람도 있어요. 우리는 애당초 같은 공간에 있지는 않아요. 보세요, 땅의 이름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침대 밑을 스쳐지나가는 소리가 들리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다 달라요. 발 밑에서 땅을 빼앗기는 속도가. 아무도 내릴 필요 없어요. 모두 여기 있으면서 여기 없는 채로 각자 뿔뿔이 흩어져 달려가는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