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날밤 혁현은 거의 자지 못했다. 천재소녀가 아침을 사주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수술이 8시에 시작인데 7시 반이라니. 물론 바빠서겠지만 선 긋기가 아닐까. 빵 쪼가리나 먹고 빨리 헤어지자는 그런 이야긴가. 도넛을 좋아하는 것인가. 혁현을 싫어하는 것인가. 도넛을 좋아하며 혁현을 싫어할 수도 있다. 가슴이 거대한 도넛에 눌리는 듯해 얕게 잠들었다. 잠들었다 깼다를 반복하니 아침이었다. 안 그래도 별로 잘생긴 얼굴을 보니 처참했다.
"여기 사람 없죠?"
당직실에 있다 온 건지, 집에 있다 온 건지 얼굴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천재소녀가 먼저 커피를 마시며 혁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없는 곳을 골랐다니, 역시 부끄러운 건가 싶어 혁현은 다시 발바닥에 땀이 났다.
"도넛의 시대가 끝난 것 같아요. 저 건너편의 베이글집은 인기던데. 기름과 설탕의 시대가 끝나다니 아쉬워요."
그런가. 그냥 도넛이 좋았던 건가.
"기름과 설탕을 먹으면 기절 같은 거 할 리 없죠."
두사람은 쟁반에 도넛을 이것저것 골랐다.
"샘 수술실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요. 유난히 수술이 잘돼요. 그런 거 믿지 않는데 징크스랄까."
"정말요?"
정말요,라니. 똑똑한 소리를 좀 해봐. 똑똑한 여자 앞에서 똑똑한 소리를 좀 해보라고. 그래, 커피를 마시자. 커피로 어떻게 좀.
"이 건물 위에 극장 들어온대요."
"정말요?"
오늘은 정말요,인가. 하루에 단어 하나밖에 쓰지 못하는 건가.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잖아. 당신한테 반하는 바람에 이 병원에 남았다고, 당신 수술을 보는 게 가장 즐겁다고, 결혼하자고, 나는 요리도 잘하고 청소도 잘한다고, 경력 단절 같은 거 절대 경험하지 않도록 육아든 뭐든 의학적 재능이 덜한 내가 하겠다고, 당신을 서포트하기 위해 내가 태어난 거나 다름없다고, 그렇게 몇년이나 몇년이나 생각해왔다고, 아니 아니, 많은 걸 바라지 않는다고, 그건 내 망상일 뿐이라고, 당신의 그 기적같은 손가락을 한번만 살짝 잡아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극장 들어오면 영화 보고 싶네요."
이번엔 정말요,마저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영화 좋아하는군요, 말고 뭐 좀 똑똑해 보이는 말 없나. 게다가 도넛을 입에 너무 많이 넣고 씹고 있었기에 리액션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
"제가 도넛 샀으니까, 다음에 극장 문 열면 영화 보여주실래요?"
"네."
천재소녀가 두번째 데이트를 제안했다. 혁현은 천재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 대답했다. 그 빠름이 좀 민망할 정도였다. 사실 혁현은 도넛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 그대로 멈춰 평생 도넛만 먹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데이트겠지? 이거, 데이트겠지?
"데이트에요."
혁현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천재소녀가 말했다. 뒤늦게 카페인이 몸에 도는지 귀가 울렸다. 천재소녀가, 채원이 수술이 있다며 먼저 병원으로 돌아갔다. 병원까지 쫄래쫄래 따라가고 싶은 걸 가까스로 참았다. 도넛 가게의 화장실에서 앞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다. 그럴 만한 날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깨달았다. 알고 있었어. 내가 좋아한다는 걸. 내가 내내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언제부터 알았을까?
아마도, 눈만 보고.
정세랑, <피프티피플> 중에서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Faye webster, She won't go away (0) | 2017.05.28 |
---|---|
토니와 수잔 (0) | 2017.03.11 |
맨체스터 바이 더 씨 (0) | 2017.02.25 |
뷰티인사이드 (0) | 2017.01.28 |
해피투게더 春光乍洩 (0) | 2017.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