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1127

도서관 기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구두를 잃어버린 것에 대해서도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았다. 어머니의 옆모습은 여느 때보다 아주 조금 슬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단지 느낌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이후로 나는 한 번도 도서관에 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그곳에 가서 그 지하실 입구를 확인해보고 싶은 기분도 든다. 하지만 나는 이제 거기에는 가까이 가고 싶지 않다. 해질녘에 도서관 건물을 보기만 해도 발이 오그라들어 버리는 것이다. 가끔씩 지하실에 두고 온 새 가죽 구두를 생각한다. 그리고 양 사나이를 생각하고 아름다운 소녀를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나로선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채로 나는 점점 그 지하실로부터 멀어져간다. 지금도 나..

Review 2020.08.03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 그녀의 책에는 내가 그때까지 읽어왔던 에세이들과는 다른 결이 있었다. 그녀의 글에서 그녀는 성공한 사람도, 자유로운 사람도, 세상 다른 사람들보다 어딘가 특별하고 특출한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을 타인처럼 여기고 있었다.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여러 종류가 있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무심했고, 더 나아가 무정하기까지 했다. 이겨내기 어려웠을 것이 분명한 비참한 순간에 대해 기록하고는 바로 다음 단락에서 슈퍼 앞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태연하게 스크류바를 먹는 장면을 적어넣는 식이었다. 본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그런 식의 구성이 여러 번 반복되었는데, 그것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에게는 그런 아프고 폭력적인 순간들이 스크류바를 먹는 순간만큼이나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이..

Review 2020.08.02

이윽고 슬픈 외국어

그렇게 집중하던 일 년이 지나고 약간 한숨을 돌릴 때쯤, 이번에는 수필 같은 것을 써보고 싶다는 기분이 강해졌다. 그래서 고단샤의 《책》이라는 작은 잡지에 매달 연재를 하게 되었다. 한 회분의 원고량은 사백 자 원고지 스물 한장에서 스물 두 장 정도로, 그때까지 내가 쓴 연재 수필 중에서 가장 많은 매수였다. 그렇지만 연재를 계속하는 일 년 반 동안 길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작가라는 사람은, 많든 적든 모두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어느 쪽이냐 하면, 글을 써나가면서 사물을 생각하는 인간이다. 문자로 바꾸고 나서 시각적으로 사고하는 쪽이 편할 때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는 매달 그 정도 분량의 매수가 있는 쪽이 넓게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미국에 오고 나서 일 년 정도 사..

Review 2020.08.02

마음의 오류들

일부 강박장애(과식이나 도박이나 성행위에 몰두하는 것)는 약물 중독과 아주 비슷하다. 중독은 특정한 보상에 대한 과장된 반응이므로, 중독성 물질에 활성을 띠는 뇌 영역들은 음식, 돈, 섹스에도 활성을 띌 가능성이 높다. 약물중독자와 비만인 사람의 뇌 영상을 비교하면 뇌에 비슷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드러난다. 중독자가 약물 투여를 계속하면 보상 체계의 일부 영역들에서(쾌감의 조건 형성이 이루어짐으로써) 활성이 줄어드는 것처럼, 비만인 사람도 음식을 먹는 동안 쾌감이 줄어든다. 비만인 사람의 보상 체계는 도파민에 덜 반응하고 도파민 수용체의 밀도도 낮은 경향을 보인다.오리건연구소의 카일 버거와 에릭 스타이스는 청소년들의 섭식 습관을 조사한 흥미로운 연구를 했다. 그들은 먼저 체중이 서로 다른 청소년 15..

Review 2020.08.02

시선으로부터,

-질문자 성공적인 결혼의 필수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심시선 폭력성이나 비틀린 구석이 없는 상대와 좋은 섹스.질문자 흥미로운 대화나 서로에 대한 이해 같은 건요?심시선 아이, 남편들이랑 무슨 대화를 해요? 그네들은 렌즈가 하나 빠졌어. 세상을 우리처럼 못봐요. 나를 해칠까 불안하지 않은 상대와 하는 안전한 섹스, 점점 좋아지는 섹스 정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폭력은 사람의 인격을 조각한다. 조각하다가 아예 부숴버리기도 하지만 폭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폭력의 기미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데, 그렇게 얻은 감지력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도 있고 절망해 방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서 한 가지 결로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치욕스러운 경험도 요긴한 자원으로 썼으니 아주 무른 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 명은이..

Review 2020.08.02

당고를 먹고 나서

집 근처 홈플러스 익스프레스에서 장을 보다가 요새 떡 같은 쫄깃한 식감의 음식이 계속 먹고 싶었던 것이 떠올라 당고를 사왔다. 당고를 다 먹고, 플레인 요거트에 볶은 오트밀을 조금 섞어서 좀 더 먹었다. 그리고서 핸드폰으로 이런저런 쓸모 없고 자극적인 연예 기사를 넘겨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계속해서 당고를 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달고 쫀득함. 새롭고 즐거움. 당고를 먹는 느낌과 감정이 주는 만족감과 쾌락을 뇌에서 계속해서 원하고 있는 것이다. 쾌감을 더 요구하는 내 머릿 속을 바라보고, 바라보고, 바라본다.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를 들끓는 마음이 아닌 이성적인 사고로 알아차리고 바라보는 것. 그 것이 욕구를 이해하고 다스리는 첫 번째 관문이라고 읽은 바 있음을..

Diary 2020.07.07

200629

며칠 전에 동생이 시킨 택배 박스에서 바퀴벌레가 나왔다. 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동생 성격상 꼼꼼하게 처리하지 않고 대충 눈에 보인 벌레만 죽이고 아무데나 버렸을 듯) 그 후로 매일 한 두마리씩 작은 바퀴벌레가 보이기 시작했다. 페스트세븐을 사서 뿌려놨더니 뒤집어 누운 채로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어제는 밤에 몸이 간지러워서 잠이 깼는데 (진드기도 창궐하는 모양) 방문 틈 근처에서 유유히 걸어가는 새끼 바퀴벌레를 또 발견했다. 결국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어나서 대충 홈트를 하고 집 근처 약국에서 진드기 스프레이, 진드기 퇴치 시트, 맥스포스겔을 샀다. 맥스포스겔을 트랩 안에 짜서 5군데 정도 부엌과 거실, 택배 박스를 정리하는 바깥쪽에 놔두었는데 조금만 짰는데도 냄새가 진동을 한다. ..

Diary 2020.06.29

200627

십대 때부터 품고 살아왔던 이상적인 나의 모습은 40키로 중반의 가느다란 팔과 다리, 마른 얼굴선이었다. 취직 후 자연스레 이상에서 멀어지게 된 나의 모습을 닦달하고 실망하고 채찍질하고 내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짓으로 내 이십대의 시간은 점철되어 버렸다. 아직도 우아하고 가느다란 몸과 얼굴을 동경하고 이상적인 기준에서 멀어진 나의 모습에 자주 실망하지만, 그래도 예전만큼 내 온 하루와 정신을 거기에 집착하며 쏟아 붓지는 않는다. 좀 더 건강하고 지속가능한 아름다움을 나의 새로운 이상으로 삼고, 거기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되, 현재의 모습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빛날 수 있는 사람임을 스스로에게 계속 상기시켜 주자.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과 얻고자 하는 아우라에 가까워 질 수 있는 습관, 행동, 취향을 실행하..

Diary 2020.06.27

슬프고 씁쓸하고 담담한 하루

오후에 아빠와 잠시 거실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빠 몸에서는 땀내와 뒤섞인 술과 담배에 쩔은 악취가 전해졌다. 아빠는 먼 시골에서 상경해서 돈을 벌면서 야간 학교를 다녔고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따고 사무소를 차리셨다. 한때는 여러 직원들을 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업은 쉽지 않았다. 그리고 연이은 불운한 선택으로 인해 아빠가 모았던 자산은 손가락 틈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술술술 흩어져 버렸다. 나는 초등학교때부터 아빠를 미워해왔다. 아빠는 엄마를 때렸고 심한 욕을 했고 매일 밤 술에 취해 있었다. 화장실 욕조 바닥이 담배 꽁초로 가득 채워져 있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한다. 아빠 때문에 엄마는 불행했고 나와 동생은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우리 집..

Diary 2020.06.25

습관의 말들

사치에 대한 욕구는 보들레르 식으로 말한다면 인간 정신의 불멸성에 대한 증거다. 이런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생존 밖으로 넘치는 것이 하나라도 있어야 삶이 삶이다. 하다못해 연필이라도 좋은 것을 사서 써야 한다. - 황현산,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 (난다, 2019) 걷기와 마찬가지로 요리도 한번 해 보면 일종의 관성이 붙어서 계속하게 된다. 내가 먹는 밥에 나의 시간을 들이는 일은 짐작보다 훨씬 충만한 일이다. - 하정우, 『걷는 사람, 하정우』 (문학동네, 2018)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는 행동이 바로 우리가 누구인지 말해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행위가 아니라 습관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인생이라는 영화는 슬프고 고통스러운 장면에서는 느린 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흘러가고, 기쁘고 즐거운 ..

Review 2020.06.23

단단한 삶

[명제 1] 자신을 싫어하면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이 명제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다시 한 번 말을 바꾸어 표현해 보겠습니다. [명제 2]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잘못된 명제를 믿고 있습니다. [잘못된 명제] 자신을 사랑하면 타인을 희생으로 삼는다.이 명제는 다음과 같은 옳은 명제를 잘못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기애'를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오인해서 해석하면 위의 잘못된 명제가 나옵니다. [명제 3] '자기애'는 타인을 희생으로 삼는다.앞서 설명했듯이 '자기애'는 자신을 미워하는 것에서 발생합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자기상을 위조하는 데 필요한 자원을 타인에게서 빼앗습니다. [잘못된 명제] 타인을..

Review 2020.06.14

볼드 저널 / <주말의 발견> 호

이홍안, 안가청 부부에게 주말은 각자의 조각을 채집하는 시간이다. 공통분모를 나누거나 교집합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궁리하고 실현하는 데 몰두한다. 남편이 게임과 만화, 영화 감상을 할 수 있는 고립된 방을 꾸리는 동안 아내는 아이와 함께 짧거나 긴 여행을 떠난다. 시시각각 자유롭게 각자의 흥밋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의 조각들이 형형색색의 빛깔을 만들어낸다. 결국 이 생동감 넘치는 파편들은 가족이라는 하나의 그림으로 귀결된다. 부모로 살아가는 동안 내가 희석되는 것은 너무나 쉽다. 내가 없이 가족 구성원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공허해진다. 이들 부부가 개인으로서의 나를 찾기 위해 지내온 숱한 주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곳에서는 아주 단순한 법칙이 있었다. 가족 구성원 중 그 누구도..

Review 2020.06.14

회복탄력성, 시련을 행운으로 바꾸는 마음 근력의 힘

강력한 회복탄력성의 기반이 되는 진정한 행복감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긍정적 태도에서 오는 것이지 외부적 조건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결단을 통해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관계가 건강한 사람이다. 소통능력의 핵심은 자기 자신과 긍정적인 내면 소통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대인관계는 내면관계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회복탄력성을 약화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부정적 정서는 두려움이다. 두려움에서 좌절감이 나오고 좌절감에서 분노가 싹튼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행복의 조건이라고 굳게 믿는 것(돈, 권력, 지위, 외모 등)을 얻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다른 하나는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행복의 조건을 혹시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한다. 이러한 두려움을 근본적으..

Review 2020.06.14

베어 매거진 / <우울함에 대하여> 호

- 아, 그 시기를 벗어나는 게 아니라 함께 지나가자는 거에요? 그렇죠. 우울함이 선천적이거나 오랜 시간 다져온 성격이라면 완전한 치유가 안 될 수도 있는 거에요. 전 순간순간의 계절을 느낀다고 생각해요. 우울이라는 추운 계절을 함께 보낼 사람들이 주변에 있는 게 위로인 것 같고, 꼬이 필 거라는 기대를 해보는 거죠. 예전엔 저도 힘들 때마다 그 감정을 피하기 바빴어요. 나에게 오지 말라고 발버둥 쳤고요. 지금은 그 우울을 받아들여요. 그래 왔니? 하면서요. 부정적이라고 여겨지는 감정이 밀려왔을 때 우린 보통 뛰쳐나가잖아요.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게 돼요. 내게 우울한 감정이 온 거지 우울함 자체가 나인 건 아니잖아요. 그 사실을 아는 순간 그 감정이 두려움으로 작용하지 않게 되..

Review 2020.06.14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불행이 때로는 행복의 가면을 쓰고서 유혹적으로 다가오듯이, 행복의 짓궂은 점은 이따금 감쪽같이 불행으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오스카 와일드는 이것을 아주 적절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신은 인간들을 벌하려는 경우에, 그들의 기도를 들어준다.’” 정말 그렇더라. 불가능해 보였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졌다가 결국은 파국으로 끝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계속 불행한 인생도, 계속 행복한 인생도 없다. - 여행이라는 것은, 우울치료제로 여행을 복용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더없이 넓은 동굴이고 또한 가장 작은 동굴이다. 그런 여행에서는 아무와도 친구가 되지 않는다. 나 자신과도 더 친해지지 않는다. 그냥 나를 잘 모르겠고 내가 싫은 상태로 어딘가로 갔다가 그대로..

Review 2020.05.24

인사 잘 하기

- 인사는 내가 상대방의 존재를 존중한다고 말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 즉 인사를 안하는 것은 상대방의 존재함을 존중하지 않는 건방진 태도이다 - 사회생활에 있어 인사는 받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주는 데 의의가 있는 행동이다 상대방의 반응을 두려워하지 말고, 생각하지 말고, 기계적으로라도 꼭 인사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기! (ง •̀_•́)ง

Diary 2020.05.15

궁금한 것

나는 가끔 먹는다는 행위를 통해 나를 증명하려고 한다. 특히 심심한 날. 귀중한 주말이 무료하게 흘러갈 때. 혹은 오염되고 때묻은 하루의 남은 시간에. 뭔가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음으로써 내가 소중하고 귀한 존재임을 내 시간의 값짐을 증명하려고 혹은 보상받으려고 그러는 건가 만족은 찰나일 뿐이고 지속되는 것은 후회와 자기혐오 뿐인데 ㅠㅠ - 그래서 오늘 과식한 것 : 크림치즈를 듬뿍 바른 건포도깜빠뉴, 에그타르트, 생초콜릿, 그리고 냉장고에 있던 동생꺼 식량 몇가지

Diary 2020.05.09

애쓰다 지친 나를 위해

- 오래도록 할 일 없이 쉬며 간신히 할 수 있게 된 말이 “그게 나인걸, 어쩌라고”였다. 그 한마디를 몸으로 느끼는 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싫어하던 나의 부분들과, 내가 회피하고 싶었던 나의 감정들을 바라보고 고치려 노력해보고 다독이며 그것들이 나의 부분이라는 걸 알아갔다. 예전의 나는 어딘가 망가졌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한 번도 망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내 스스로 절박하여 망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당신이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부장이니 어머니니 친구이니 연인이니 하는 호칭에 당신이 가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나은 직급이나 더 나은 연봉을 위해,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무리하게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당신이 좋아하는 소고기..

Review 2020.04.30

어른이 되는 법

목욕 후에 타월을 펼치고 있는 엄마 품에 뛰어들기만 하면 물기가 사라지고, 깨끗하게 잘 마른 파자마를 입을 수 있고, 바로 잠들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침대로 옮겨지는 것처럼. 나는 그런 식으로 나를 다듬어서 어른으로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나. - 야마우치 마리코, 중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많은 시간과 헛발질투성이의 너덜너덜한 경험'을 거듭하면서 내가 얻은 건 꿈꿔왔던 멋진 어른의 모습이 아닌, 불충분하고 못난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움이라는 걸, 20대의 나는 결코 알지 못했더랬지.

Review 2020.04.30

탐페레 공항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장류진, 중에서

Review 2020.04.30

메켈 정비공의 부탁

너는 누비아 탑에서부터 해안가의 염전 지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해안 쪽으로 눈을 돌리면 둔덕처럼 쌓인 흰색의 소금 결정과 붉은 지붕의 풍차들이 보이지. 바람에 함유된 소금기가 네 몸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너는 멈춰 서서 소금 결정이 쌓인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봐. 이따금 코끝으로 스며드는 비린내로 인해 구역질이 난다는 것 이외에, 너는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않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감탄스럽지 않다기보다,네가 느끼는 감정은 네가 하는 일에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야.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보는지니까.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는 것, 음식을 씹고 음미하는 것. 그렇게 감각을 통해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 그런 것들은 너의 10년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야. 세부적인 사항..

Review 2020.04.29

계시, 꽃

그들 사이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요한은 울기도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았다. 잘못은 사람이 아닌 시간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의 '그 순간'과 매 순간 이별함으로써 요한은 자기의 시간을 뉘우쳤고 뉘우침으로써 시간의 근본적인 슬픔을 깨닫고 있었다. 깨달으며 살고 있었다. 시간의 근본적인 슬픔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요한의 목적이 된다. 사람을 '그 순간'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면, 사람은 요한의 경험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람을 목적으로 여기는 것은 도덕이고 '그 순간'을 향하는 것은 예술이다. 시간의 근본적인 슬픔 속에서만, 즉 '그 순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도덕을 아름다움과 동일한 것으로서 획득할 수가 있음을, 사람들 사이에서, 요한은 절감하고 있었다. - ..

Review 2020.04.29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겪는 불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과거에 비해 상당히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불안이 점점 커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가진 것과 현재의 나에 만족하지 말라고, 미래를 생각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사회 곳곳에서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SNS를 보며 부러움을 느끼거나 홀로 뒤처진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을 느껴보셨을 거예요.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고 걱정할 이유가 없는데도 계속 타인을 의식하고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불안을 키우는 거지요. 사실 불..

Review 2020.04.21

아치디에서

그녀는 말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수록 박수 소리가 커진다는 것을 알아서, 무리를 해서, 열심히 해서, 착하게 굴어서, 그렇게 조그마한 칭찬이라도 받아서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었다고. 타인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줄 거라는 기대는 하나씩 버렸다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말자,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다짐하며 살아왔다고. 그녀에게 삶이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 최은영, 중에서

Review 2020.04.21

200418

오늘 먹은 것들. 더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동생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면서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에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매일 하는 루틴으로 한시간 공복 운동을 한 뒤 액상홍차를 탄 두유와 작은 크로와상을 아침으로 먹었다. 마을 버스로 1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구립 도서관에 갔는데 코로나 때문에 회원가입을 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퇴근한 아빠를 만났다. 손님이 없어서 일찍 퇴근해버렸다는 아빠와 두부 가게에 들렀다. 딸이 참 예쁘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둘째딸은 더 이뻐, 라고 자랑스럽게 아빠는 대답했다. 나는 동생과 비교하면서 나를 깎아내리는 부모님에게 더 이상 나의 존재 가치를 폄하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왔고 이제는 거기에 심각하게 흔들리지도 않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Diary 2020.0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