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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는 법

목욕 후에 타월을 펼치고 있는 엄마 품에 뛰어들기만 하면 물기가 사라지고, 깨끗하게 잘 마른 파자마를 입을 수 있고, 바로 잠들기만 하면 되는 상태로 침대로 옮겨지는 것처럼. 나는 그런 식으로 나를 다듬어서 어른으로 만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이었나. - 야마우치 마리코, 중에서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많은 시간과 헛발질투성이의 너덜너덜한 경험'을 거듭하면서 내가 얻은 건 꿈꿔왔던 멋진 어른의 모습이 아닌, 불충분하고 못난 나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움이라는 걸, 20대의 나는 결코 알지 못했더랬지.

Review 2020.04.30

탐페레 공항

나는 알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후회하는 몇가지 중 하나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애써 다 털어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내 안 어딘가에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고, 떼어내도 끈적이며 남아 있는, 날 불편하게 만드는 그것. 내가 그것을 다시 꺼내는 데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고 꺼내서 마주하게 되더라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기는 힘들 거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 장류진, 중에서

Review 2020.04.30

메켈 정비공의 부탁

너는 누비아 탑에서부터 해안가의 염전 지대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해안 쪽으로 눈을 돌리면 둔덕처럼 쌓인 흰색의 소금 결정과 붉은 지붕의 풍차들이 보이지. 바람에 함유된 소금기가 네 몸 이곳저곳에 달라붙어. 너는 멈춰 서서 소금 결정이 쌓인 바다를 오래도록 바라봐. 이따금 코끝으로 스며드는 비린내로 인해 구역질이 난다는 것 이외에, 너는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않아.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감탄스럽지 않다기보다,네가 느끼는 감정은 네가 하는 일에서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야. 중요한 것은 네가 무엇을 보는지니까. 오래도록 바라보는 것,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는 것, 음식을 씹고 음미하는 것. 그렇게 감각을 통해 기억을 만들어내는 것. 그런 것들은 너의 10년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야. 세부적인 사항..

Review 2020.04.29

계시, 꽃

그들 사이에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느라 요한은 울기도 웃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지만 원망하지는 않았다. 잘못은 사람이 아닌 시간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날의 '그 순간'과 매 순간 이별함으로써 요한은 자기의 시간을 뉘우쳤고 뉘우침으로써 시간의 근본적인 슬픔을 깨닫고 있었다. 깨달으며 살고 있었다. 시간의 근본적인 슬픔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요한의 목적이 된다. 사람을 '그 순간'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면, 사람은 요한의 경험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사람을 목적으로 여기는 것은 도덕이고 '그 순간'을 향하는 것은 예술이다. 시간의 근본적인 슬픔 속에서만, 즉 '그 순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도덕을 아름다움과 동일한 것으로서 획득할 수가 있음을, 사람들 사이에서, 요한은 절감하고 있었다. - ..

Review 2020.04.29

내가 원하는 것을 나도 모를 때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겪는 불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현재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는 느낌, 우리가 동등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우리보다 나은 모습을 보일 때 받는 그 느낌, 이것이야말로 불안의 원천이다. 과거에 비해 상당히 풍족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불안이 점점 커지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지금 가진 것과 현재의 나에 만족하지 말라고, 미래를 생각하고 더 나은 사람이 되라고, 사회 곳곳에서 끊임없이 채찍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다른 사람의 SNS를 보며 부러움을 느끼거나 홀로 뒤처진 것 같은 우울한 기분을 느껴보셨을 거예요.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고 걱정할 이유가 없는데도 계속 타인을 의식하고 비교하면서 끊임없이 불안을 키우는 거지요. 사실 불..

Review 2020.04.21

아치디에서

그녀는 말했다. 무거운 짐을 짊어질수록 박수 소리가 커진다는 것을 알아서, 무리를 해서, 열심히 해서, 착하게 굴어서, 그렇게 조그마한 칭찬이라도 받아서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경험하고 싶었다고. 타인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해줄 거라는 기대는 하나씩 버렸다고. 다른 사람에게 기대지 말자,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다짐하며 살아왔다고. 그녀에게 삶이란 오로지 자기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것이었다. - 최은영, 중에서

Review 2020.04.21

200418

오늘 먹은 것들. 더 늦잠을 자고 싶었지만 동생이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면서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에 일찍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매일 하는 루틴으로 한시간 공복 운동을 한 뒤 액상홍차를 탄 두유와 작은 크로와상을 아침으로 먹었다. 마을 버스로 15분 남짓한 거리에 있는 구립 도서관에 갔는데 코로나 때문에 회원가입을 할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하고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길에 퇴근한 아빠를 만났다. 손님이 없어서 일찍 퇴근해버렸다는 아빠와 두부 가게에 들렀다. 딸이 참 예쁘다는 아주머니의 말에 둘째딸은 더 이뻐, 라고 자랑스럽게 아빠는 대답했다. 나는 동생과 비교하면서 나를 깎아내리는 부모님에게 더 이상 나의 존재 가치를 폄하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해왔고 이제는 거기에 심각하게 흔들리지도 않지만 그래도 마음이 조금..

Diary 2020.04.18

모래로 지은 집

-내 말에 모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모래를 어떻게 아프게 할지 나는 알았다.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그날 공무와 나는 둘이 만났다. 명동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밖으로 나오니 좋은 날씨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속 걸었다. 종로3가에 줄을 지어 있던 가위바위보 게임기에서 돈을 잃기도 하고, 인사동을 지나면서 과일주스를 사 먹기도 했다. “이제 어디로 갈까?” 공무의 물음에 나는 경복궁을 지나 부암동 쪽으로 가보자고 말했다. 그렇게 걸으면서도 하나도 피곤..

Review 2020.04.18

삼체

“길고 긴 과학 발전사에서 물리학자들이 가속기로 양성자를 몇 개나 충돌시켰겠습니까? 그리고 중성자와 전자는 또 얼마나 충돌시켰겠습니까? 1억 번은 넘을 것입니다. 한 번 충돌할 때마다 그 미시 우주 속의 지능이나 문명은 멸망했을 것입니다. 사실 대자연 속에서도 미시 우주의 멸망은 시시각각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양성자와 중성자의 붕괴 그리고 대기층에 들어오는 고에너지 우주선(宇宙線)은 1000만 개 이상의 미시 우주를 멸망시킬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감상적이 된 것은 아니시죠?” - 류츠신, 중에서

Review 2020.04.18

터널을 지날 때

영화평론가 이동진 블로그 글 中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까지 찾아가 아내 에우뤼디케를 구해내는데 성공한 오르페우스에겐 반드시 지켜야 할 금기가 주어집니다. 그건 저승을 다 빠져나갈 때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는 조건이지요.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 속 설명에 따르면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에, 그녀가 포기했을까 두려움에 사로잡혀" 그는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맙니다. 이로 인해 아내를 데려오는 인을 결국 마지막 순간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지요. 구약 성서에서 롯의 아내도 그랬습니다.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불로 심판 받을 때 이를 간신히 피해 떠나가다가 신의 명령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소금 기둥이 되었으니까요. 금기를 깨고 뒤돌아보았다가 돌이나 소금기둥이 되는 이야기는 전세계 도..

Review 2020.04.14

0 이하의 날들

또 한편, 내가 소설을 읽고 쓰기 시작한 근원에 하루키가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이전의 문학의 풍경이 어땠는지를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건 내가 문학이 살아 있던 시기를 목격한 적이 없다는 뜻이 된다. 나에게 문학이란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낡은 동상 혹은 시체 안치소 한구석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신원미상의 시체였다. 그런데 일본의 평론가 카라타니 코오진에 따르면 과거 문학은 세계 전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떠밭음으로써 한갓 소설나부랭이에서 그 이상의 것으로 도약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현실에 직접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어쩌면 그래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요즘 쓰이는 소설들에서 느..

Review 2020.04.10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지고 싶다면 먼저 책상부터 마련하라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지고 싶다면 먼저 책상부터 마련하라 아침에 기상 후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세면대로 가는 사람 A가 있는가 하면, 침대를 차마 벗어나지 못하고 뭉그적대다 그러고도 일어서지 못하고 침대에 엉덩이를 걸친 채 멍을 때리다 겨우 세면대로 가는 사람 B도 있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고 다른 스타일이라는 시각에서 이야기하고 싶다. 이런 두 유형의 사람을 가정해 보면 이들의 행동 양식에 따라 (개인의 취향과 별개로) 두 사람의 방을 채우는 사물이 달라질 수 있다. A는 침대 옆 러그의 필요성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B는 늘 그렇듯 침대에 걸터앉아 멍 때리던 어느 겨울 아침에 생각할 것이다. '아, 발 시려.' 그러고는 아마 출근길에 '침대 러그'를 검색할 수도 있을 테다. 아주 단순화한..

Review 2020.03.24

구병모, 파과

그녀는 이 손톱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딱히 보여줄 사람이 없기도 하고. 혹시 모를 일이다. 시니어패스를 단말기에 대다가, 편의점에서 껌 한 통을 사기 위해 지갑을 뒤지고 지폐를 내밀다가, 그런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 속에서 누군가들은 스쳐 지나가듯이 이 손톱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손톱을 보고 바로 이어서 손톱 주인의 얼굴을 올려다보자마자 눈을 휘둥그레 뜰지도 모르지. 도저히 당신과 같은 나이의 사람에게 어울리는 장식이 아니라는 편견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다만 침묵하거나 헛기침하며 흘끔거리겠지. 그러나 이 순간 그녀는 깨지고 상하고 뒤틀린 자신의 손톱 위에 얹어놓은 이 작품이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

Review 2020.02.29

김사월, 누군가에게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특별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네가 사랑받기에 결국 이해 못한대도 넌 아름답지 너는 누군가에게 너무 완벽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사람이 되기도 하고 너의 무의식과 감정 모두 하나뿐이고 절대적인 것을 그런 너에게 상처를 주고 기쁘게 하는 그런 사람도 단 하나뿐이었다는 거 하나뿐인 사람의 사랑 내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밤에

Playlist 2020.01.01

요가 매트만큼의 세계

문득 난 요가를 진심으로 즐기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시켜서 한 일도 아닌데 잘해야 한다는 강박을 끌어안고 있었다. 시험 보는 수험생처럼 기초를 탄탄히 하고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매사에 진지하고 치열해지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그것대로 좋다. (열심히 하면 좋잖아요.) 하지만 무리한 목표 탓에 현재 누릴 수 있는 즐거움마저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의문이다. 요가가 주는 정신적 고양, 고요하고 단순한 세계, 자유로움, 가벼움, 넉넉함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그건 정말이지 손해 보는 짓이다. 즐기지 못하면 손해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무인양품의 디자인 철학은 “이것으로도 충분하다.”라고 한다. ‘이것이 좋다’를 내세우는 게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에 ..

Review 2019.12.14

191203

행복해지고 싶어 보다는 불행해지기 싫어 란 생각이 오늘 흔들리는 나를 더 단단히 붙잡아 주었다 근검 절약 자제를 올바른 삶의 태도로 여기며 살아가기로 다짐한지라 최근 사는(buying) 재미를 멀리하고 지냈다 그런데 요 며칠간 유난히 내 얼굴이 못생겨보였고 뒤룩뒤룩 살이 붙은 몸을 거울로 비춰볼 때마다 우울해졌고 그런데도 매일 저녁마다 계획보다 더 많이 먹어버리는 나 자신이 너무 너무 너무 싫고 우울했다 아스팔트에 내 몸과 얼굴을 패대기치고 뭉게버리고 싶을만큼 나 자신이 미웠다 그래서 이런 우울한 기분에 대처하기 위해 오늘 저녁도 빵과 과자라는 값싼 위로를 선택하려다가, 마음을 다잡고 기력을 겨우 끌어올려서 버스를 타고 ddp에 갔다 귀여운 엽서와 포스트잇과 신년 캘린더를 샀다 쇼핑하고 걸으며 돌아다니는..

Diary 2019.12.03

우울하다우울해

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 내 기분과 가장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 마음을 다른 사람이 온전히 알아주지 않는다는게 이렇게까지 분통하고 우울해 해야 할 일인가 싶지만서도 내가 부족하고 경솔하여 저지른 실수들이 나의 오늘에 흩뿌려져 따끔거린다 모든 게 성에 차지 않고 불만족스럽고 배가 아프고 살이 찌고 위액이 부글부글 올라온다

Diary 2019.11.28

우울시계

우울하다 우울해 지금 이 시간엔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해 지금이 몇 시지? 열한 시 반 우울하다 우울해 또 우울시계가 째깍째깍 우울하다 우울해 라면 왜 먹었지? 살 찌겠네 비가 온다 비가 와 끈적거리게 자꾸 비가 와 잠이 온다 잠이 와 그냥 세상 만사 귀찮아 시간이 흐르면 가슴 찢어지던 이별도 시간이 흐르면 이불 걷어찰 어린 기억도 잊혀진다 잊혀져 그냥저냥 휙휙 지나 가 잊혀진다 잊혀져 그땐 그게 전분 줄 알았는데 시간이 흐르면 지금 이리 우울한 것도 시간이 흐르면 힘들다 징징댔던 것도 한때란다 한때야 날카로운 감정의 기억이 무뎌진다 무뎌져 네모가 닳아져 원이 돼 우울하다 우울해 무뎌져 가는 게 우울하다 씁쓸하다 씁쓸해 한약을 달여 마신 듯 씁쓸 우울하다 우울해 별 것도 아닌데 우울하다 우울하다 우울해 ..

Playlist 2019.11.28

191123

빵집은 위험하다. 빵집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는 오감을 무자비하게 자극한다. 문을 열자마자 쏟아지는 설탕과 시나몬의 달콤한 냄새. 몽롱하게 이성을 흐트러뜨리는 어둡고 노란 불빛. 순식간에 바깥과 다른 시공간으로 빠져들어버린듯 마법적인 느낌을 연출한다. 먹지 않고 사지 않겠다던 굳은 결심은 빵집 안에서 스르르 녹아 흩어진다. 이성적이고 추하고 모든 의욕과 입맛을 떨어트리는 외부 현실과의 완벽한 차단을 위한 이러한 빵집의 연출적인 요소가, 다만 지나치면, 공간적 답답함을 느끼도록 만든다. 카페보다 빵집의 좌석에 오래 머물기 힘든 이유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유있게 머물기 위해서는 창이 크고 햇빛이 밝게 쏟아지고 차가운 공기가 스며드는 카페를 골라 가도록 하자. 물론 이런 실내 조건을 만족하는 카페 겸 빵집..

Diary 2019.11.23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1. 라이너 풍크의 [서문] 中 현실에 대한 이런 시각과 인식은 포스트모던에 와서 현실은 생산, 창조, 제작된다는 생각으로 대체되었다. 창조된 현실을 기존 현실에 견주어 평가하라는 요구는 점점 외면당하고, 일부는 명백히 부인당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당하기도 한다. 의도적 무시 현상은 모든 분야에서 관찰된다. 오락 산업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세계는 자연 체험보다 더 흥미롭고 스릴 넘친다. 전달받은 뉴스는 직접 탐구한 소식보다 더 신빙성이 있고, 오스트레일리아나 캐나다에 사는 어떤 사람과 인터넷을 통해 맺어진 관계가 이웃과의 관계보다 더 매력적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인간이 창조한 가상의 세계에서 더 편안함을 느낀다. 마약, 암시요법, 환각 물질에 끌리는 마음은 자신이 창조한 현실을 더 우대하는 사실로 설명이 ..

Review 2019.11.13

숨결이 바람될 때

229p 결국 이 시기에 내게 활기를 되찾아준 건 문학이었다. 너무나 불확실한 미래가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돌아보는 곳마다 죽음의 그늘이 너무 짙어서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를 짓누르던 근심이 사라지고, 도저히 지나갈 수 없을 것 같던 불안감의 바다가 갈라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여느 때처럼 나는 통증을 느끼며 깨어났고, 아침을 먹은 다음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에 대한 응답이 떠올랐다. 그건 내가 오래전 학부 시절 배웠던 사뮈엘 베케트의 구절이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나는 침대에서 나와 한 걸음 앞으로 내딛고는 그 구절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I..

Review 2019.11.11

이 삶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아침이 되자 존은 크루아상과 자신이 제일 즐겨 읽던 신문을 사러 나갔고, 나는 핸드폰을 쥐고 커다란 유리창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눈을 떠 바쁜 걸음으로 출근하는 행운을 누리는 파리지엔의 모습을 지켜보며 오래 된 음성 메시지를 재생했다. "그냥 걸었어." 엄마가 말했다.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 니나 리그스, 중에서

Review 2019.11.10

시인 황인찬이 말하는 이유

GQ KOREA │ CULTURE 시인 황인찬이 말하는 이유 김종삼은 한국 시 문학사에서 가장 탁월하게 침묵과 여백을 다루는 시인이었다. 나는 시가 침묵해야 한가는 것을 그의 시를 통해 배웠다. 시가 침묵을 통해 보다 진실한 것을, 더욱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의 시를 통해 배웠다. 이를테면 이런 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희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깨비처럼 - '북치는 소년' 이 시는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서술어는 커녕 주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부사로만 성립하는 시. 다른 시인들의 시 가운데 이보다 말수 적은 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보다 침묵과 여백을 잘 다루는 시는 나로서는 선뜻 떠오르지 ..

Review 2019.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