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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이 때로는 행복의 가면을 쓰고서 유혹적으로 다가오듯이, 행복의 짓궂은 점은 이따금 감쪽같이 불행으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것이다. (중략) 오스카 와일드는 이것을 아주 적절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신은 인간들을 벌하려는 경우에, 그들의 기도를 들어준다.’” 정말 그렇더라. 불가능해 보였던 간절한 소망이 이루어졌다가 결국은 파국으로 끝나는 일은 드물지 않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계속 불행한 인생도, 계속 행복한 인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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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라는 것은, 우울치료제로 여행을 복용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에서 더없이 넓은 동굴이고 또한 가장 작은 동굴이다. 그런 여행에서는 아무와도 친구가 되지 않는다. 나 자신과도 더 친해지지 않는다. 그냥 나를 잘 모르겠고 내가 싫은 상태로 어딘가로 갔다가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다. 그냥, 동굴에 들어갔다, 나왔다.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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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일상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배가 고프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졸리지 않으면 자지 않는다.
음악을 배경으로 쓰지 않는다.
뜻을 모르겠는 여행지의 소음 속에 그냥 서 있는다.
팔과 다리의 움직임을 생각하며 바람을 느끼며 걷는다.
시계를 보지 않고 맛을 느끼며 먹는다.
지하철에서 뛰지 않는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
바뀌는 신호등을 보내고, 출발하는 버스를 그냥 보낸다.
시간을 그냥 보낸다.
고작 이런 걸 하기 위해 날 찾는 사람이 없는 곳에 가서 지낸다. 바다를 보고 있거나 정원을 보고 있거나 그냥 잠만 자거나. ‘다음에 해야 할 일’이 없이 살아본다. ‘혼자’ 여행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이 시간이 내게 소중해서다. 시간을 그냥 보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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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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