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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다 지친 나를 위해

유연하고단단하게 2020. 4. 3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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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할 일 없이 쉬며 간신히 할 수 있게 된 말이 “그게 나인걸, 어쩌라고”였다. 그 한마디를 몸으로 느끼는 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가 싫어하던 나의 부분들과, 내가 회피하고 싶었던 나의 감정들을 바라보고 고치려 노력해보고 다독이며 그것들이 나의 부분이라는 걸 알아갔다. 예전의 나는 어딘가 망가졌다고 생각했으나, 나는 한 번도 망가진 적이 없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내 스스로 절박하여 망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당신이 당신이었으면 좋겠다. 부장이니 어머니니 친구이니 연인이니 하는 호칭에 당신이 가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 나은 직급이나 더 나은 연봉을 위해, 더 나은 무엇이 되기 위해 무리하게 애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신 당신이 좋아하는 소고기를 먹었으면 좋겠다. 소고기가 싫으면 고추바사삭도 좋겠다. 당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당신이 당신의 욕망에 가까운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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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잘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고,감정에 흔들리기보다는 눈앞에 당면한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착각이었다. 나는 나를 온전하게 통제하여 다루는 게 아니라,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억눌리다 못한 나B는 터져나왔다.

어쩌면 공황은 나B의 언어였을 것이다. 말 못 하는 나B가 나A에게 몸으로 전하는 언어. ‘나 여기 있어. 나 괴로워. 나는 한계야. 나를 좀 쉬게 해줘.’ 예전부터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나B가 표현하고 있었으나 내가 무시하던 그 말. 공황으로 거칠게 표출되고서야 간신히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 그 격한 언어에 나는 간신히 멈춰 섰다.

나는 당장 녀석과 잘 살아가고 싶다. 그래서 녀석을 알아간다. 나B는 무엇을 싫어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못 견뎌 하는지, 무엇에 짜증을 내고, 무엇에 슬퍼하는지를 알아가며 나를 통제하는 감각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B, 나C, 나D 등등 내 안에 다양한 주체들이 숨어 있었음을 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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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은 인정의 길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무언가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나를 칭찬해주는 무언가를 계속 따라다녔다. 나는 칭찬에 굶주렸다. 대단한 사람이고 싶었고, 칭찬은 나의 대단함을 입증해주는 방법이었다. 칭찬이 나를 어떻게 조종하는지 모르는 채, 나는 인정과 칭찬에 중독되어갔다.

보여주는 것을 줄이고, 솔직한 나를 드러내려 노력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 내 욕망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나. 스스로의 인정 욕구에 대해 이해하고 그 욕구를 적정한 선에서 충족시켜주려 노력하는 나. 그런 나를 바라며, 오늘도 나는 나를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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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글로도 옮겨 적어본다. 감정의 해부학이라 할 수 있을까. 지난 기억을 해부하여 당시의 내 마음을 돌이켜보는 것. 내 몸과 머리의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일 것이다. 나를 존중하고자 하면 먼저 나를 이해해야 하니까. 내가 나의 감정을 존중하기 전에 내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니까.

일상 속에서 의식적으로 감각과 감정을 느껴본다. 음식을 씹을 때 혀의 감각을 느껴보고, 바람이 뺨에 닿을 때의 감촉을 생각하고 느껴본다. 순간 감정이 올라오면 그 감정을 그대로 느끼려고 애쓴다. 화를 그저 화로, 슬픔을 그저 슬픔으로, 즐거움을 그저 즐거움으로 보도록 노력한다. 생각은 자동적으로 의심으로 흐른다. 그 흐름을 의식적으로 막고, 순간의 감각만 온전히 느끼려 노력한다. 감정들을 그대로 놔두고 나는 다만 바라본다. 의심과 생각을 덜어내고, 감각과 나의 거리를 좁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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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의 과거를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아무리 과거를 싫어하고 피하고 싶어 해도 과거의 나는 그대로 과거의 나이다. 결핍으로 인해 비틀린 욕망 역시 나다. 그것을 비틀렸다고 지칭하는 것 자체가 이미 나의 과거를 어둡고 불편하게 여기는 것이다. 과거를 애써 부정하지 않고, 온전한 나의 일부분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밖에는 답이 없다. 과거를 품고 가되, 과거에 함몰되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것,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다.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나에 얽매인다.

트라우마를 벗어나는 방법은 트라우마를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트라우마를 똑바로 바라보고 그 녀석과 잘 지내는 방법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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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은 몸에 박힌 습관이고, 불안은 나의 행동을 지배하는 관성이다.

나는 내 안의 외할아버지의 세계관과 마주함으로써 이제 겨우 그 세계에서 벗어난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불안, 그것에서 겨우 벗어나 나의 즐거움을 향해 간다. 외할아버지의 세계를 완전히 버릴 수는 없다. 그 불안 덕분에 여태 나는 살아갈 수 있었고, 그 불안이 나를 혼자서 자립할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안의 외할아버지를 토닥이고, 나의 세계를 늘린다. ‘어떻게 살아야 먹고 살 수 있는가’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나 스스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 그렇게 나의 세계를 넓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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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규정될 수 없다. 나는 과거의 어떤 사건으로 규정되어서는 안 된다. 나의 남은 생은 여생이 아니다. 삶은 계속된다. 과거에 어떤 부침이 있었다고 할 때 그 과거를 없던 것으로 할 수는 없지만, 그 과거를 품고 살아갈 수는 있다. 사람은 과거에서만 살아가지 않는다.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내 인생은 계속된다. 과거를 흘려보내고, 오늘을 단단하게 다져서, 나는 새로운 시간을 향해 간다. 망친 인생은 없다. 내 인생도, 다른 인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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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위하여’는 ‘나를 위하여’에서 출발한다. 나의 성공을 위하여 취업을 하고 나의 행복을 위하여 결혼을 하고 나의 성장을 위하여 노력을 한다. 그런데 ‘위하여’를 몇 단계 거치다 보니, 수단이 목적이 되어버린다. 회사를 다니는 것은 나를 위함인데, 어느 순간 그 마음을 잊고서 눈앞에 보이는 일에 미치고, 일의 해결을 위하여 모든 것을 쏟아내버리고, 그러다가 정말 미쳐버리고.

쉬며, 다시 생각했다. 나의 1순위는 나라는 거. 세상이 나를 부품으로 쓰고 버리더라도, 누군가가 나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삼더라도, 남이 나를 수단으로 쓸지라도, 나를 위하여 사는 것임을 잊지 말자고. 내가 내가 아니고 무언가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릴 때 수단으로서 그 수단을 달성하기 위해 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시간을 반드시 만들어주자고. 그것이 쉼이 알려준 가르침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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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순간을 대단한 것으로 채워놓으려는 자세는 나를 좀먹는다. 조금씩 조금씩 생활에서부터 계획을 내려놓고, 완벽을 내려놓고, 다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즐거움을 찾아간다.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 건 아니지만, 덜 아픈 사람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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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지금을 견뎌야 하는 순간으로 만들지 않는 것.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최선을 다해 좋은 것을 주고, 좋은 것을 보여주고, 좋은 걸 누리게 하는 것. 지금의 나를 위한 나의 공간을 가꾸는 것. 나는 그렇게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어찌될지 모르는 나의 미래가 현재를 착취하지 않도록, 미래에 대한 불안이 현재를 갉아먹지 않도록 나는 지금 나의 공간을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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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밀린 업무만큼이나 밀린 빨래가 중요하다. 나는 내 월급과 직책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겠지만, 그만큼 중요한 건 나에 대한 책임이다. 그리고 내가 나를 책임을 지는 방식은, 나를 나답게 하는 것은 소소한 쉼들이다.

비로소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일하기 위하여 쉬지 않는다. 나는 쉬기 위하여 일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록을 적는다면, 지금 나의 1순위는 쉼이라 하겠다. 모두들, 잘 쉬었으면 좋겠다. 모두들 잘 무의미해졌으면 좋겠다. 나는 이제 잘 쉰다.

 

 

- 서덕, <애쓰다 지친 나를 위해> 중에서

 

 

 

매일 아침 운동하고 있다는 성취감에 익숙해져서 무리하게 일찍 일어나려고 몸부림 쳤던 수요일 저녁에 그래서 나B는 폭식으로 억눌려있던 자기 존재를 표출시킨 거였니? 나B가 끄덕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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