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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값을 치른 음식을 어떻게 먹든 내 자유’라는 생각에는 더 깊은 생각이 필요합니다. 더욱이 자식을 돌보며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어머니라면 자식에게 “너도 나처럼 요령 있게 먹어 봐”라고 가르치는 일, 그래서 자식의 사고 회로에 ‘내게 바로 보복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연민’이 자라나지 못하게 막는 일은 삼가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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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T언니는 괴로워하는 동생을 외면하지 않았고, 시간을 내 하소연을 들어주었고,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조언했습니다. 언니가 밈에서 나오는 사람처럼 언어 폭력을 휘둘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이 격해 있던 동생에게 도움이 되었다고도 하기 어렵지요. 무위해성의 원칙에 비추어 그녀가 비윤리적으로 행동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미덕을 발휘했다고 보기도 힘듭니다.
언니가 ‘신중함(prudence)’이라는 미덕을 발휘할 수 있었다면 먼저 격앙된 동생의 감정을 어루만져 가라앉혔을 것입니다. “저런, 정말 속상했겠네”, “나도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런 말을 듣고 곧바로 조퇴하지 않고 버틴 게 대단하네” 등등 동생에게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표시를 하여 감정이 누그러지도록 하는 거지요. 그래서 동생이 어느 정도 평정심을 회복한 뒤에 “하지만 상사로서는 어이가 없지 않았을까?”, “네가 그런 실수를 할 아이가 아닌데 참”, “다음부터는 잘하면 돼”와 같이 조심스럽게 동생이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이를 교훈 삼아서 발전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바람직했을 겁니다. 이는 “네가 옳고 상사가 틀렸어”라는 식으로 자신의 판단과 다른, 솔직하지 않은 위로를 하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이처럼 ‘신중하고 배려하는 솔직함’만이 미덕이라 부를 만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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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주장에 대해서는 ‘누칼협’이라는 반응이 나옵니다. 진상규명을 하고 말고 할 것 없다, 그냥 어쩌다가 일어난 사고이고 죽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아닌 죽은 사람들이 책임질 일’이라는 것이지요. “뭐, 누가 그때 그 자리에 가서 있으라고 칼 들고 협박했나(누칼협)?”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누칼협 소리에는 대체로 이런 주장이 이어집니다. ‘놀러 가서 우르르 몰려다니다 제풀에 죽은 건데 왜들 난리야?’, ‘아마 마약도 했을걸?’ 사실상 ‘정신 나간 짓을 해서 자기 무덤을 판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사고를 당한 개인에게 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지 않습니다. 두 여중생도 하필 사람이 거의 다니지 않고 군 장갑차가 수시로 다니는 길을 다닌 게 잘못이고, 바다 속에서 삶을 마감한 청소년들도 오래 걸리고 위험한 뱃길 수학여행을 거부하지 않은 게 잘못이겠지요.
누칼협은 온갖 사회 모순과 병폐, 구조적 문제점에 대해 눈을 감고, 모든 것은 개인의 실수, 노력 부족, 불운 때문이라 쳐버리는 태도와 맞물려 있습니다.
하지만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읽은 미국 백인들이 저마다 ‘알빠노!’를 외쳤다면? 근로기준법을 지켜 달라 부르짖으며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주검 앞에 모두가 ‘누칼협?’을 던지고 말았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요?
어쩌면 알빠노, 누칼협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푸념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힘들게 사니까요. 물질적 조건은 그 어느 때보다 양호한데도 경쟁은 줄기는커녕 점점 더 느니까요. 요람에서 무덤까지 쉴 새 없는 경쟁, 경쟁, 경쟁에 지치다 보니, ‘그래서 나더러 뭘 어쩌라고? 나 좀 내버려 둬. 나는 나 하나 챙기기도 힘들단 말야!’ 하며 비명을 지르고들 있는지도 모릅니다.
세상이, 아니 적어도 우리나라가 ‘망해가고 있다’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말세야, 말세!”라는 푸념은 수천 년 전부터 끊이지 않았다고 하니 지나친 말일지도 모르지만, 경제적으로는 역대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시기임에도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비전은 잘 보이지 않고, 삶의 버거움은 아예 태어나는 일을 원천봉쇄하며, 태어난들 자살이나 어처구니 없는 사고로 죽어가야 하는 사회… 그런 문제점을 두고 정치권은 집권에만 골몰하면서 도무지 개선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세상이라면? 지금의 풍요로움이 최후의 화려함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윤리적 태도의 약화와 비인간적 태도의 심화, 그것은 AI, 기후변화, 동북아 전쟁보다 우리의 앞날에 더욱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무관심과 샤덴프로이데의 악에 대해, 여러 철학자와 심리학자 들은 그런 성향이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다고 합니다. 가령 울고 있는 동생이나 자동차 고장을 푸념하고 있는 연인에게 공감하기보다 문제 해결책만 자꾸 들이미는 ‘T적 행동’도 엷은 무관심으로 볼 수 있지요. 또, 늘 엄친아였던 동기나 잘 나가던 연예인이 스캔들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아이구, 저런” 하면서도 살며시 유쾌하다는 기분이 일어나는 걸 느끼기 쉬운데, 이것도 일상 속에서의 한순간의 샤덴프로이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기형적인 체제, 각박할 필요가 별로 없는데도 각박하게끔 만드는 환경에 오래 처해 있을 때 그런 성향이 점점 가지를 치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선량한 시민일 수도 있었던 사람이 소시오패스나 사이코패스로 훈련되는 것입니다.
희망은 아직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무수히 많은 ‘비윤리적 댓글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르고 따뜻한 댓글들’도 없지는 않습니다. 묵묵히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많은 관심과 환호가 쏟아집니다.
이런 소중한 마음들을 이어갑시다. 그리고 내가 ‘정의로운 댓글’이라고 믿었던 것이 어떻게 보면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깨닫는 일, 댓글과 게시글로만 토로해 온 정의를 실제 행동으로 구현할 결심을 하는 일, 집권 자체만이 목적이 되어 극한까지 양극화된 정치를 바로잡아 진실로 국민의 눈물을 닦아 줄 정치로 바꿔 나가는 일 등을 포함하여,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말세가 되지 않도록 애써 봅시다.
이토록 다정한 개인주의자 | 함규진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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