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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 엄살원

유연하고단단하게 2024. 9. 22. 22:42



  ‘생추어리’란 기존의 착취적인 환경에서 고통받던 동물이 온전한 모습으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인간과 비인간동물이 함께 노력하는 공간이다. 국내 최초의 생추어리, 새벽이생추어리에는 살아남은 돼지 ‘새벽이’와 ‘잔디’가 산다. 그들은 누구의 반려동물도 아니고 상품도 아닌 돼지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 “여러분은 지금 동물들의 안식처에 들어오셨습니다. 그들이 주인이고 여러분이 방문객임을 잊지 말아주세요.” 새벽이생추어리 입구에 적힌 안내 문구다.

  새벽이는 태어나자마자 인간에 의해 꼬리와 송곳니를 제거당했다. 새벽이가 자라날 곳은 돼지라면 누구나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게 되는 환경이니 물어뜯을 수 있는 힘도 물어뜯기게 될 부위도 미리 없애버린 것이다. 태어난 그 다음다음 날에는 생식기를 잘렸다. 거세한 돼지의 살은 노린내가 덜하다. 다 좋은 고기가 되라고 겪은 일이었다.

  잔디는 새벽이와 달리 실험용으로 만들어진 돼지다. 그는 인위적인 교배를 통해 작은 체구와 연한 피부, 선천적 기형이 있는 코를 갖게 되었다. 잔디가 어떤 폭력을 경험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제약회사로 추정되는 곳에서 탈출을 시도했고, 그 과정에서 머리를 크게 다쳤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새벽이는 생후 6개월이 지나기 전에 도살될 예정이었다. 잔디는 실험동물로서 쓸모를 다해 안락사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새벽이도 잔디도 정해진 용도대로 살다 갈 생각이 없었다. 새벽이는 동물권 단체 직접행동DxE 활동가를 만나 공개구조라는 형태로 종돈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존재는 그가 계속 살기를 원하는 인간들로 하여금 새벽이생추어리를 짓게 했고, 자신이 먼저 자리 잡은 땅에 잔디가 이주할 수 있게 했다.

돼지란 내 삶에서 늘 깔끔하게 토막 나 가격표가 붙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덕분에 나는 아주 오랫동안 굉장히 많은 양의 돼지고기를 먹으면서도 돼지가 누군지 감쪽같이 모를 수 있었다. 그런데 새벽이생추어리는 그런 내게 고기가 아닌 돼지를 알게 한다. 좋고 싫음이 분명하고, 풀숲을 뒤지거나 땅을 파면서 놀고, 진흙 목욕을 하며 시원해하는 돼지의 일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돼지가 인간에게 주는 아주 드문 기회다.

  


- <엄살원>, 안담, 한유리, 곽예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