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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달리기

유연하고단단하게 2025. 2. 15.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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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첫 달리기를 시도한다면 그건 실패를 자초하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예견된 실패 앞에서는 언제나 당당해도 좋다. 약간의 뻔뻔함은 도전하려는 마음을 지키는 방패가 되어준다. 그리고 그 방패를 앞세워 슬금슬금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목표에 도달하기 마련이다. 조금 느리더라도 꾸준히 하면 언젠가는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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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속도를 유지하려 애쓰는 게 달리기만의 일은 아닐 것이다. 삶에도 사람마다의 페이스가 존재한다.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를 수도 혹은 느릴 수도 있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우리는 쌓아온 경험을 바탕으로 내게 맞는 최적의 페이스, 다시 말해 가장 나다운 삶의 속도와 방식을 이미 알고 있다. 그 페이스로 각자의 크고 작은 목표에 닿기 위해 하루하루 힘겨운 레이스를 이어간다.

하지만 나만의 페이스로 살아가는 게 여간 어렵지 않다. 일상의 속도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정해지기 일쑤다. 특히 대부분은 속한 집단에서 요구하는 속도에 맞춰 살아간다. 안타깝게도 집단의 목표는 개인의 속도보다 늘 두세 발 앞서가기에 우리는 그 간극 속에서 매번 힘겨워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 침대에 쓰러진다. 그 모습은 달리기 초보 시절, 녹초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던 것과 매우 비슷하다. 삶에서든 달리기에서든 오버 페이스 앞에서는 장사 없다.

그렇다고 환경만을 탓할 순 없다. 때로는 오버 페이스를 스스로 자초하기도 한다. 마이 페이스를 유지만 해도 언젠가 목표에 닿을 수 있음을 우린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안일한 생각들이 마음의 눈을 가린다. 날 추월하는 누군가를 볼 때마다 불안과 욕심이 평정심을 뒤흔든다. 목표는 완주이지 남들보다 먼저 도착하는 게 아닌데도 추월의 유혹은 너무 강렬하다. 결국 설익은 상태에서 액셀을 질끈 밟아버린다. 혹시나 했던 마음이 역시나 하는 결과와 마주하고서야 지난 과오를 알아채고 또 한 번 자책한다.
  
예전에는 높은 위치에서 반짝이는 사람들에게 눈이 갔다. 달리기로 치면 남들보다 먼저 골인해 메달을 걸고서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들. 그때마다 마이 페이스를 저버리고, 동경하는 타인의 속도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삶의 기준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옮기자 거대한 간극과 마주했고 늘 그 괴리 속에서 헐떡였다. 아무리 버티려 해도 나가떨어지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마이 페이스의 품으로 돌아왔고 언제나 그 여정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요즘은 안정된 페이스로 꾸준히 달리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둔다. 느리고 답답할지언정 결국 자신만의 속도로 성취해내는 이들에게서 작은 힘을 얻는다. 한때는 번뜩이는 순간만을 좇았지만 지금은 내 삶이 마이 페이스의 꾸준함으로 건실히 단련되고 숙성되길 바란다. 지금의 느릿한 페이스를 흐트러짐 없이 이어가길, 앞으로도 마주할 수많은 유혹과 의심의 구덩이를 현명히 극복하길, 마지막으로 나뿐 아니라 각자의 속도로 나아가는 모두의 여정이 무탈하길 빈다.



아무튼, 달리기 | 김상민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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