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책 / 아무튼, 현수동

유연하고단단하게 2024. 9. 13.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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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섬을 폭파했을 때 섬의 윗 부분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래 기반암은 남았다. 섬의 밑동은 그렇게 한강 수위가 내려가면 모습을 드러냈고 유량이 많아지면 수면 아래에 잠겼다. 그 주위에 토사가 쌓였다. 버드나무 씨앗이 싹을 틔웠고,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린 새들이 찾아왔다. 얼마 뒤에는 겨울철새가 쉬어 가는 곳이 되었다. 여름이면 섬 전체가 잠겼지만 겨울에는 그럴 걱정이 없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밤섬은 서서히 물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돌섬이 아닌, 띄엄띄엄 떨어진 모래섬이 되었다. 홍수에 강한 버드나무가 빽빽하고, 느릅나무, 억새, 갈풀이 덩굴을 이뤄 마치 정글 같은. 수면 위아래로 여러 종류의 나뭇가지와 푸이 드리워진 장소는 물고기들이 알을 낳기에 적합했다. 붕어, 잉어, 누치, 쏘가리, 메기가 오자 그 고기들을 잡아먹으려고 새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세계적으로 희귀한 도심 속 철새 도래지가 탄생했다. 2017년에 조사한 바로는 밤섬에는 식물이 137종, 조류가 50종, 곤충을 비롯한 무척추동물이 169종 산다. 밤섬에 사는 새 중에는 천연기념물도 있고, 멸종위기 1급과 2급 조류도 있다. 흰뺨검둥오리 같은 새는 원래 철새였는데 밤섬이 너무나 편했는지 이곳에서 1년 내내 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밤섬은 해마다 4,200~4,400 제곱미터씩 커졌고, 합쳐졌고, 마침내는 폭파 전보다 훨씬 더 큰 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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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개 구와 2개 시에서 살아본 내게 고향에 가장 가까운 느낌의 동네는 광흥창역 일대다. 떠올리면 애틋한 기분이 들고, 나를 위한, 나를 기다리는 장소 같으며,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이유가 뭘까? 꽤 긴 시간 여러가지 답변을 궁리했는데, 유력 후보 중 하나는 '광흥창역 일대에 역사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래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괜찮게 살았고, 얼마 전에도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그곳에서 괜찮게 살았으며, 그래서 나도 그곳에서 괜찮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안전하고 희망적인 느낌.
허허벌판 위에 지은 신도시에서는 그런 느낌을 얻을 수 없다. 원주민의 흔적을 완전히 지워내고 땅 위에 있는 것을 다 무너뜨린 뒤 새로 아파트를 지은 대규모 재개발 단지에서도 드런 느낌을 받을 수 없다. 그런 동네에서는 모든 것이 새로워서 모든 것이 가짜 같고 모든 것이 덜 믿음직스럽다. 불행히도 한국에서는 그런 식으로 대형 주거단지를 건설한다. 반대편에서는 원도심이 생명력을 잃고 낙후되어간다. 
현수동의 길을 걷다 보면 '이 곳은 무척 오래되었구나, 아주 예전부터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다간 사람들의 흔적이 쌓여 있구나'라는 기분이 든다. 그런 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수백 년 전과 수백 년 뒤라는 시간을 의식하고, 자신이 그 일부라고 여기게 된다. 거리와 골목을 함부로 대하지 않게 된다. 자기 존재가 깊은 뿌리, 또 먼 미래와 이어져 있음을 믿게 된다. 현수동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 존중하고 대화한다.
 이런 역사 감각은 조선시대 궁궐이나 민속촌을 걸을 때에는 얻지 못한다. 그런 장소들에는 현재가 너무 희박하며, 나는 그 공간의 방문객일 따름이다. 궁궐에 살았던 사람은 나와 비슷한 신분도 아니었다. 궁궐이나 민속촌의 존재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그런 곳이 내 고향이 될 수는 없다는 얘기다.

  과거와 현재가 으르렁거리며 대치하는 곳도 있다. 땅 위에 있는 것을 다 무너뜨린 뒤 새 단지를 지으려 했는데 그 과정에서 보존 가치가 높은 문화유적을 발굴하는 경우가 그렇다. 설계를 급히 변경해 유적을 ‘보호’하는 시설을 갖춰도, 주변 새 건물들과 도통 어울리지 않는다. ‘저것 때문에 개발이익을 제대로 못 뽑았다’고 하는 원망과 적대감이 감도는 장소도 있다. 송파구의 한성백제 유적이 그렇고, 종로의 육의전박물관이 그렇다. 그나마 나와 신분이 비슷한, 비교적 최근 사람들의 흔적은 아예 보존 가치 자체를 인정받지 못한다.



 
- 장강명, <아무튼, 현수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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