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방송 시작까지 삼십 분이 남았다. 리허설이 시작된다고 한다. 세트장을 향해 걷는다. 남자 MC가 진행자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네 사람이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자리에 앉는다. 슬아의 자리는 소설가와 영화감독 사이다. 세트장 소파 중앙에 앉아 핀마이크를 건네받는다. 슬아의 마이크 착용을 돕던 여자 스태프가 멈칫한다.
“왜 그러시죠?”
슬아가 묻자 스태프는 당황한 기색으로 “잠시만요” 하고 사라진다.
소설가와 영화감독은 문제없이 마이크 착용을 마친 듯하다. 슬아는 마이크가 오기를 기다린다. 사라진 스태프는 세트장 구석에서 몇몇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다. 표정이 굳은 걸 보니 심각한 사안으로 보인다.
대기실에서 만났던 섭외 담당 작가가 다시 나타난다. 그는 여자다. 여자로서 은밀히 조언하듯이 슬아에게 속삭인다.
“저기, 속옷을…… 착용하셔야 한다고……”
슬아가 자신의 팬티 색깔을 기억해내며 되묻는다.
“속옷이요?”
“네…… 그…… 브래지어를……”
“아!” 팬티 말고 브라였다. 그놈의 브래지어. 슬아는 익숙한 답답함을 다스리며 차분히 묻는다. “브래지어를 하라고 말씀하신 게 혹시 어느 분일까요?”
담당 작가는 곤란해하며 피디 쪽을 본다.
“제가 직접 이야기 나눌게요.”
슬아가 피디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카메라 뒤에 선 피디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슬아를 보며 머리를 긁적인다. 그는 남자다. 남자 피디 앞에 바짝 다가선 슬아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피디님.”
“네, 작가님.”
“브래지어에 대해 말씀하셨다고 들었어요.”
“네, 그게……”
“문제가 되나요?”
“아무래도…… 밝은 톤의 옷을 입으셔서……”
슬아가 오늘 입은 옷은 크림색 셔츠다. 단정한 상의이며 딱히 비침이 없는 소재다. 슬아가 남자 소설가를 가리키며 묻는다.
“저분 옷이 더 밝지 않나요?”
소파에 앉은 남자 소설가에게로 모두의 시선이 향한다. 그는 새하얀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이곳에서 그의 젖꼭지는 아무런 문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자의 젖꼭지를 문제삼는 장소가 있던가. 여름날 학교 운동장에서 셔츠를 훌렁훌렁 벗고 등목하는 이들도 모두 남자애들뿐이었다.
피디는 곤란해하며 말한다.
“아무래도 이슬아 작가님은 여성분이시다보니……”
슬아는 이런 대화가 국민체조만큼이나 익숙하다. 그나저나 피디는 말을 끝까지 맺지 않는 것이 습관인 모양이다. 슬아가 피디의 말을 따라 하며 묻는다.
“여성분이시다보니?”
“그러다보니…… 시청자분들이 불편해하실 수가 있어서……”
“그렇군요~” 라고 대답하면서 슬아는 그게 내 알 바인가 생각한다. 세트장 인물들의 시선이 점점 슬아와 피디에게로 모이고 있다. 슬아는 좀처럼 물러설 생각이 없다.
“브라를 하고 말고는 제가 알아서 할 일인 것 같은데, 피디님 생각은 어떠세요?”
피디는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한다.
“맞습니다. 근데 이게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서……”
“그럼 누가 결정할 수 있는 부분일까요?”
“아무래도…… 윗분들이 컨펌하지 않으실 거예요.”
슬아는 자신의 유두가 컨펌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게 웃겨서 푸하하 하고 웃어버린다. 슬아가 웃자 모두가 쳐다본다. 웃음 뒤에는 한숨이 새어나온다. 겨우 m&m 초콜릿 한 알만한 젖꼭지를 가지고 이럴 일인가.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거의 알아챌 수도 없는데 말이다. 물론 포도알만한 젖꼭지나 앵두만한 젖꼭지 역시 문제될 이유가 없다.
한숨 속에서 슬아는 만나본 적 없는 윗분들의 얼굴을 상상해본다. 피디는 부장님 핑계를 대며 노브라를 반대하고 있다. 부장은 자신의 상사인 국장님 핑계를 대며 반대할 것이다. 국장은 사장 핑계를 댈 것이고, 사장은…… 사장은 어떤 윗사람의 핑계를 댈까? 윗사람의 윗사람의 윗사람을 거슬러서 저 하늘 끝까지 올라가면 누가 있을까? 사장이 기독교 신자라면 하나님이 계실 것이다. 불교 신자라면 부처님이 계실 수도 있다. 하나님과 부처님은 브래지어 따위 한 번도 안 차보셨을 테니 이게 얼마나 환장할 불편함인지 알 턱이 없다. 혹시 성모 마리아께서는 브래지어를 하셨을까. 부디 아니셨기를 슬아는 소망한다.
윗분들과 국민들에 대한 이야기를 피디는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불편해하실 분들이 많으세요. 국민 정서상 문제가 될 수 있어서……”
국민 정서는 누가 정하는가? 슬아도 국민인데 남의 찌찌에 관심이 없다.
“출연자의 상체가 불편한 것은 문제되지 않나요? 피디님도 유두가 있으시잖아요. 제 유두만 특히 더 가려야 하는 이유가 뭐죠? 유두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것도 아니잖아요.”
두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사이 생방송 시작 시간이 코앞에 다가왔다. 작가들과 스태프들이 초조해 보인다.
“피디님, 지금 오 분 전이라……”
피디를 재촉하는 듯하지만 모두 슬아를 바라보고 있다. 원망 섞인 응시다. 슬아가 조금만 양보하면 모든 일이 수월해질 것이다. 다들 그렇게 하는데 슬아는 왜 여기 와서 굳이 고집을 부린단 말인가.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 영화감독도 슬아에게 다가와서 타이른다.
“무슨 얘긴지 알아. 나도 많이 겪어봤어. 근데 여긴 싸우기 적절한 장소가 아니야. 다음에 싸우자.”
여자의 말을 연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싸우기 적절한 장소가 도대체 어디일까? 그리고 다음은 언제일까?
슬아도 안다. 이쯤 되면 그냥 브래지어를 하는 게 더 편하다. 설득보다 그게 더 간단하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늘 챙겨 다니는 것이 있다. 바로 니플 패치. 유두를 가리는 목적으로 제작된 스티커다. 몹시 짜증나는 상황에선 어쩔 수 없이 이것을 사용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사용한 건 지난 추석 때였다. 브래지어보다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더 번거로운 방식으로 불편했기 때문에 양쪽 가슴에 붙였다. 니플패치는 대부분 꽃모양이다. 슬아는 젖꼭지에 스티커를 붙여야 한다는 사실도 좆같지만 그것이 꽃모양이라는 사실도 좆같다고 느낀다. 몇 시간 붙였다가 떼고 나면 꽃모양의 땀띠 자국이 남는다.
“가슴을 티 안 나게 하라는 거죠?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슬아의 뒤에 대고 피디가 고맙다고 말한다. 피디와 작가들이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생방송 시작 삼 분 전이다.
세트장 벽 뒤에서 슬아가 파우치를 연다. 그리고 살색 니플 패치를 꺼내든다. 옆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 셔츠 단추를 푼다.
“이 분 전입니다!”
슬아는 끈적끈적한 니플 패치를 손에 들고 있다. 붙이기만 하면 된다. 붙인 뒤에 마이크를 차고 방송에 임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슬아는 돌연 골똘해진다.
‘이거 안 붙이면 어쩔 건데, 씨바?’
그야 슬아도 모른다. 한국에서 노브라로 방송에 출연한 여자를 한 명밖에 본 적 없기 때문이다. 그 여자는 무사하지 않았다. 슬아는 그 일을 오랫동안 곱씹었다. 그 여자가 유별난 것처럼 이야기되던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일 분 전입니다!”
벽 뒤에서 재촉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슬아는 양손으로 니플 패치를 구겨버린다. 시원하게 꽉꽉 구겨서 바지 주머니에 쑤셔넣는다.
세트장 한가운데로 걸어가 앉는 슬아의 호흡은 편안하기만 하다.
그렇게 생방송이 시작된다.
두 시간 뒤, 국수로 배를 채운 웅이가 방송국 정문 앞에 다시 나타난다. 차를 대기시킨 채 슬아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다. 슬아는 아까처럼 산뜻하고 용맹한 모습으로 정문에서 걸어나온다. 조수석에 탄 슬아에게 웅이는 묻는다.
“촬영 어떠셨나요?”
슬아는 태평히 대답한다.
“다음주부터는 안 와도 된대요.”
“고정 패널로 섭외된 거 아닌가요?”
“짤렸어요.”
웅이는 별말 없이 차를 몬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서 다른 한 손으로는 슬아에게 담뱃불을 붙여준다. 사정은 모르지만 괜히 이렇게 중얼거려본다.
“방송국놈들이 바보지 뭐.”
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아요. 저 사람들 조만간 도태될 거야.”
그러자 웅이의 머릿속엔 멸종한 생물들이 그려진다. 슬아는 차창을 내린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차 안으로 훅 들어온다.
“더워라. 등목 한판 하고 싶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그것을 생각하며 슬아는 방송국으로부터 유유히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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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아, <가녀장의 시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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