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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사랑은 인생의 가장 큰 위로 같다. 종교를 진지하게 믿기엔 과학 서적을 너무 많이 읽은 나는 사실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세상에 나타난 데는 아무런 이유도 목적도 없다는 걸 알고 있다. 의미를 찾기엔 완벽하게 허무한 삶에서, 한 존재가 다른 수많은 존재 중에 하필 바로 그 단 한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막연하나마 '아, 내가 이 사람을 만나려고 이 세상에 왔구나' 하고 느끼게 되는 사건이라니, 대단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종교가 주는 위로에 필적하는 위로다. 누가 종교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전능한 신보다는 무능한 인간들 사이의 사랑을 더 믿어요"라고 대답하곤 한다.
사랑은 인간에게 닥치는 가장 근사한 이벤트이자동시에 가장 크게 배울 수 있는 기회다. '사랑은 개체에서 전체를 발견하는 것'이라는 말을 좋아하는데,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해본 자만이 인류를, 나아가서는 전 존재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랑의 강력한 힘은 그와 나 사이를 경계 짓는 울타리를 부숴버린다. 사랑만이 전면적으로 상대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또 기꺼이 상대를 내 안에 들여앉히는 기회가 된다. 그런 경험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의 세계는 넓어진다. 진정한 사랑이 서로를 성장시키는 이유다.
사랑은 처음에는, '빠지는' 듯 느껴진다. 어디론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기도 하다. 사랑이 나를 떠밀고 가는 것 같다. 힘든 줄도 모르겠고 그저 사랑에 몸을 내맡기면 된다. 그러다 어느 시점이 지나면,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잘 유지하려는 서로의 노력과 기술 없이 사랑은 건강하게 오래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끝나곤 한다. 다행인 것은 사랑이 끝나도 사랑한 경험과 넓어진 세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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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난한 친구들의 약삭빠르지 못함은 한 프로젝트를 끝내고 난 뒤 나를 다시 원위치로 돌려주는 역할을 했다. 그 친구들은 무엇이 중요하며, 또 무엇을 잃지 말아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가리켜주는 나침반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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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간쿠로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와 <기사라즈 캐츠아이> 등 히트 드라마의 각본을 쓴 뒤 '천재 각본가'라 불리며 쉴 새 없이 스케줄을 소화하는 사이사이 차기작 각본을 쓱쓱 써내는 그에게 인터뷰어가 물었다.
"이렇게 바쁜 와중에 각본을 그렇게 잘 쓰시는 비결이 뭔지 궁금합니다."
그의 대답이 내겐 충격이었다.
"일단 잘 쓰고 싶지도 않고요......."
잘 쓰고 싶지 않다니? 그게 바로 그의 작품들이 갖는 신기함의 원천일지도 몰랐다. '잘하려고 한다'는 게 뭔가? 기존에 정해진 '잘함'의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맞추어 높은 성취를 이끌어내기 위해 힘쓰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 힘을 빼버릴 때 '잘함'의 기준을 전복하는 전혀 새로운 매력이 생겨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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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나, <힘 빼기의 기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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