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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공포를 버텨내는 힘이 달라졌다. 그라운드 위에서나 그라운드 밖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물리적 충돌을 대면하는 수밖에 없다면 여차하면 나도 육탄 방어할 거야, 때릴 수 있다면 나도 같이 때릴 거야,라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공포가 조금 줄었다. 진짜로 그럴 수 있든 없든(아마도 실제 상황이 닥치면 못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이지만), 그런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았을 때는, 백지처럼 새하얘진 머리와 함께 온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당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는 점도 공포의 요인이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상상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고통을 떠올리며 더 심하게 얼어붙곤 했다. 그런데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고통이 구체성을 띠고 다가오니 그게 또 두려움을 한결 줄였다. 적어도 나를 집어삼킬 정도로 커지지는 않았다. 이것만도 굉장한 발전이었다. 우리는 보통 폭력에 제압당하기 전에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먼저 제압당하니까. 수비수 한 명을 제친 기분이었다.
3년 전, 한 스터디 모임에서 수전 브라운밀러의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를 읽었다. 무척 고통스러운 독서였고 ‘싸우는 여성’에 관해 함께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폭력의 피해자가 되곤 하는데도 어려서부터 육체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훈련받을 기회를 박탈당한다. 싸움에 대처하는 법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갑자기 들이닥친 신체적 폭력 앞에서 공포에 압도된 나머지 해볼 수 있는 어떠한 시도조차(심지어 주머니 속에 휘두를 수 있는 칼이 들어 있는데도 손을 넣어 칼을 꺼낼 시도조차) 못한 채 고스란히 당하는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에서 폭력을 금기시하는 내면의 억압과 공포가 여성의 손발을 묶어버린다는 대목을 읽을 때, 영화 〈벌새〉에서 걸핏하면 폭력을 휘두르던 오빠가 스스로 그칠 때까지 당하고만 있던 은희에게 영지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맞지 말라고. 누가 때리면 어떻게든 맞서 싸우라고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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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들로 나는 언젠가부터 가식을 응원하게 되었다. 물론 그 가식에 타인에게 나쁜 짓을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가 없는 한에서. 가식에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보고자 하는 분투가 담겨 있다. ‘좋은 사람’을 목표로 삼고 좋은 사람인 척 흉내 내며 좋은 사람에 이르고자 하지만 아직은 완전치 못해서 ‘가식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누군가의 부단한 노력의 과정. 그러니까 내 앞에서 저 사람이 떨고 있는 저 가식은, 아직은 도달하지 못한 저 사람의 미래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사람이 가진, 저기서 더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누군가가 “넌 가식적이야”라는 말로 섣불리 가로막을까 봐 지레 초조할 때도 있다. 실제로,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이들 중에 “내가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자기혐오가 생긴다”라고 고민 상담을 해오는 경우가 많아서이다.
‘가식적이다’라는 말에는 자기실현적인 면이 있어서 누가 그렇게 규정하는 순간부터 자신의 언행 하나하나가 가식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그건 아마도 많은 사람이 사회생활을 할 때 사회적 자아‒페르소나를 사용함으로써 말과 행동에 가식이라는 혐의를 가질 만한 부분이 일정 정도 섞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고민이 깊어지면, 나의 본모습 혹은 ‘나다움’이 무엇인지, 좋은 사람을 모방하고 연기하는 행위가 ‘나다움’을 해치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워지는데, 이런 때야말로 (드라마 배우들처럼) 본격 연기하는 톤으로 앙칼지게 외쳐야 할 때다. “나다운 게 뭔데?” 그러니까. 나다운 게 뭐길래. 보통 내 안 어딘가에 ‘진정한 나다움’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나는 그 ‘나다움’을 발견하고 찾아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나다움’의 상당 부분은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타고난 나, 만들어진 나, 만들어져가고 있는 나, 모두 다 나이다. ‘본캐’도 ‘부캐’도 다 나.
혹시 나 자신이 너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견디기 힘든 날이 있는가? 누군가 나에게 가식적이라고 비난해서 모멸감을 느낀 날이 있는가? 괜찮다. 정말 괜찮다. 아직은 내가 부족해서 눈 밝은 내 자아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내 ‘가식의 상태’를 들키고 말았지만, 나는 지금 가식의 상태를 통과하며 선한 곳을 향해 잘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노력하지 않는 사람보다 최선을 다해 가식을 부리는 사람이 그곳에 닿을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척’한다는 것에는 어쩔 수 없이 떳떳하지 못하고 다소 찜찜한 구석도 있지만, 그런 척들이 척척 모여 결국 원하는 대로의 내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점에서 가식은 가장 속된 방식으로 품어보는 선한 꿈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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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주변에는 그 누구의 충고도 필요 없이, 자기 소신껏, 길을 잃지 않고 (혹은 길을 잃더라도) 원하는 방향으로 삶을 잘 끌고 나가는 주체적이고 현명한 사람들도 많다. 반면에 기분을 거스르는 말(“충고는 더 기분 나쁘다”는 초등학생의 통찰을 상기해보자)에 귀를 꽉 막은 채, 듣고 싶은 말만 듣고,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으로만 곁을 채우며 살다 견고해진 아집과 함께 훌쩍 꼰대가 되어버린 사람들 또한 있다.
나도 당연히 전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내 그릇의 크기는 내가 잘 안다. 충고나 조언을 멀리했을 때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농후한 사람이다. 그래서 마음 놓고 귀를 막을 수 없다. 여기서 고민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언젠가부터 꼰대질이 될까 봐, 더 솔직히 말하면, 꼰대로 여겨지기 싫어서, 누군가 충고나 조언을 청해도 의식적으로 피하며 산 지 꽤 되었는데 (네 번 청하면 응하는 것으로 나름의 기준을 세웠다) 그렇다고 내가 꼰대가 아닌 걸까? ‘타인에게 충고하는 행위’가 꼰대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워낙 많이 꼽히다 보니, 충고하지 않는 것만으로 ‘나 꼰대 아님’ 인증서를 손쉽게 획득하려는 마음이 기저에 있는 건 아니고? 마치 충고만이 꼰대의 전부인 것처럼.
사실 꼰대의 특징 중에는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 지식만이 대체로 옳다고 여기는 상태’ 또한 분명히 있다. 그리고 나는 이 특징이 극복하기 더 어렵다고 느낀다. 남에게 충고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아니라고 믿지만, 남의 충고를 듣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꼰대가 되어가는 걸 모르고 사는 것. 이게 가장 두렵다.
내가 보고 싶은 것, 듣고 싶은 것, 입맛에 맞는 것들로만 만들어낸, 투명해서 갇힌 줄도 모르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있을 때, 누군가 이제 거기서 잠깐 나와 보라고, 여기가 바로 출구라고 문을 두드려주길 바란다. 때로는 거센 두드림이 유리 벽에 균열을 내길 바란다. 내가 무조건적인 지지와 격려와 위로로 만들어진 평온하고 따듯한 방 안에서 지나치게 오래 쉬고 있을 때, 누군가 ‘환기 타임!’을 외치며 창문을 열고 매섭고 차가운 바깥 공기를 흘려 보내주기를 바란다. 때로는 거센 돌풍이 방 전체를 흔들어대길 바란다. 누군가 없이 내가 먼저 알아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나만을 믿을 수는 없어서. 나만을 믿고 살 수는 없어서.
- 김혼비 산문집, <다정소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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