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84

폐허의 도시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걸음을 계속 옮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부족한 것에 익숙해야 한다. 덜 원하고, 덜 만족하고, 덜 필요로 하면 부유해진다. 이 도시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이거다. 마음속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것이 이 도시다. 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면서도 그 삶을 빼앗아 가려고 애쓰는 것이 이 도시다. 피할 도리가 없다. 아니, 피하든지 피하지 못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혹 지금은 피할 수 있다 해도 다음은 확신하지 못한다. 피하지 못하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의 나는 굉장히 상식적이고 셈도 정확한 사람이 되었다. 여기의 다른 사람들처럼 되기는 싫다. 환상이 그들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나는 절대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헛된 환상을 쫓는 사람들. 그들은 ..

Review 2010.12.27

쉿, 나의 세컨드는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내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 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 김경미, '쉿, 나의 세컨드는' 중에서 '식사법'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Review 2010.12.14

달의 궁전

내가 어디에 있건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을 거야. 당분간 우리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떠나겠지. 하지만 조만간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난 그러리라고 믿는다. 너도 알 테지만 결국에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모든 일이 다 연결될 거야. 아홉 행성의 궤도, 아홉 행성들, 아홉 번의 이닝, 아홉 번의 삶. 그걸 생각만 해 봐라. 조화는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실없는 소리는 하룻밤으로 충분해. 이제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잠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자, 손을 내밀어 봐라. 그래, 바로 그거다. 아주 단단히 쥐고, 그렇게. 자, 이제 흔들자. 그래, 됐다. 작별의 악수. 우리를 끝까지 지탱해 줄 악수.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하지만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는걸

Review 2010.12.11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팬시점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펜들 중에 마음에 드는 색깔 몇 가지를 골라내는 것 같은 기분으로 무라카미-왠지 하루키보다는 '무라카미'의 어감이 좋은-의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중에서 동그라미쳐 둔 몇 가지 이야기들 52 옛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 결혼 청첩장이 나를 오래된 거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틀 간의 휴가를 얻어서 호텔방을 예약한다. 나는 거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다. 몸의 절반이 투명하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내가 내 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12년 전에 나는 에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이 방학을 하면 나는 슈트케이스에 짐을 넣고 신간센의 새벽 첫차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풍경 같지도 않은 풍경을 ..

Review 2010.12.09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제 2의 자신, 밖에서 본 자신이라는 존재를 완성해 간다. 사람은 보이는 것, 연기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소설, 드라마, 게임. 전에 없을 정도로 허구가 소비되고 있는 이 시대, 자신을 허구 안의 등장인물로 간주하는 것이 큰 오락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일찍이 그것은 은밀한 재미였다.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을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당당하게 타인이 되기를 원한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예전의 대스타에서 자신과 비슷한 타입의 사람으로 바뀌면서부터 자기도 히로인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무대인 도회지를 보라. 아오야마, 긴자, 롯폰기. 젊은 여자들을 비롯하여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꾸..

Review 2010.12.01

FIGHTING

"넌 정말 강해.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간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고, 또 약하면 얼마나 약하겠는가. 그런 건 다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이시다 이라, 중에서 똑 부러지는 멋진 선배한테 충고를 받은 듯한 느낌 지금 내 나이 정도에 이 책을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러니 나도 징징대지만 말고, do action

Review 2010.11.02

학생의 아내

"난 맛있는 음식, 스테이크, 기름에 지진 감자, 그런 게 좋아. 좋은 책과 잡지, 밤에 기차 타는 거, 비행기를 타는 걸 좋아해."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물론 이건 좋아하는 순서로 말한 건 아니야. 좋아하는 순서대로 말하라고 하면 생각을 해봐야 해. 그렇지만 나는 그게 좋아, 비행기 타고 가는 거. 이륙할 때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어." 그녀는 한쪽 다리를 그의 복사뼈 위에 걸쳤다. "나는 밤늦게까지 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 침대에 그냥 누워 있는 걸 좋아해. 우리가 늘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 어쩌다 한번씩이 아니라. 그리고 난 섹스가 좋아.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이따금씩 날 쓰다듬어주는 것도 좋고. 영화관 가는 것, 영화 보고 나서 친구들과 맥주 마시는 것도 ..

Review 2010.10.02

보르헤스

"나는 너의 기억의 깊은 곳, 꿈들의 조수 속에 머무르겠지" 그(또 다른 나)는 말을 멈추었고, 나는 그(또 다른 나)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나 또한 그와 함께 죽었을 것이었다. 슬픔에 빠진 나는 베개를 쓸어보았다. 거기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방을 빠져나갔다. 밖에는 정원도, 대리석 층계도, 고적한 저택도, 유카리나무들도, 동상들도, 광장도, 우물들도, 아드로게 마을에 있는 농장 철책의 현관문도 없었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꿈들이었다. - 1983년 8월 25일, 끝부분에서 보르헤스는 1983년 4월 27일 지에 기고한 위의 단편에서 바로 그 날, 1983년 8월 25일 자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8월 25일을 선택한 것은 그의 생일이 8월 24일이기..

Review 2010.09.28

데미안을 꾸역꾸역 다 읽긴 했다만

1. "우리는 너무 많이 얘기한단 말야." 그는 유난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약삭빠른 이야기는 아무 가치가 없는 거야. 아무 가치가 없어.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뿐이지.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죄악이야. 사람이란 마치 거북이처럼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거든." 데미안에서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부분. '데미안'을 다 읽었다. 아프락시스 이야기까지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다. 선과 악이란 동전의 양면 같은 상호 불가분의 것이라는 걸 참 거창하게 이야기한다 싶었지만 아직 유년의 이야기이니까,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어설픈 방탕의 길로 빠져드는 부분부터는 도저히 소설 속의 어떤 인물에게도 공감할 수 없어서 인상을 팍 쓰고 삐딱..

Review 2010.09.21

브리지파트너

한정희 단편소설집 브리지파트너 소설을 '수다떠는 기분으로' 읽는 걸 좋아한다. 정말 그래, 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것들이 완벽한 표현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에 감탄하면서. 고등학교 때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처음 읽었던 뒤로 소통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취향이 되어 버렸는데 솔직히 말해서 하루키만큼 '묵직하고 완벽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준 작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며칠전 학교 도서관에서 별 기대없이 '브리지파트너'라는 소설을 집어들어 읽었다. 오랜만에 만난, 거의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이야기들이었다. 말투, 단어의 어감, 표현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던. 웃으면서 죽는 법 중에서 그녀에게는 남다른 직관이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하면..

Review 2010.08.13

백색의 봄

모든 존재는 무한한 은유를 내포하고 있으며, 다의적이다 그건 보통은 잊고 살기 마련인 사실. 마주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 존재를 지극히 보편적으로(무심하게) 규정지음으로써 그를 종종 훼손시키는 것이다. '백색의 봄' 전시에서는 선과 면, 빛과 음영 다양한 작품들마다 모두 다른 방법으로, 제각각의 의미로 백색의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었다. 순수함, 자유로움, 가벼움, 모호함, 깊이의 결여 (또는 무한한 깊이) 가녀림 (또는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밟아서 때를 묻히거나 손에 쥐고 힘주어 뭉그러 뜨리고 싶어지는 것 '때묻은' 백색, 그 불완전함에서 오는 불쾌함 순간적인 경험으로 얻어지는 빛의 이미지 (우리의 경험이 '시간'에 의지하는 한) 경험되는 '실체'라는 것은 유약할 수밖에 없음 백색의 일상적인 물체..

Review 2010.07.29

안개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덜컥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고 그녀는 걱정한다. 창밖엔 안개가 짙다. 내 어린 낙타는 벌써 잠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집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저녁. 살아 있는 집과 죽은 집, 불 켜진 집과 꺼진 집. 모든 집들이 모여 긴 오징어 다리를 달고 흐느적흐느적 헤엄치는 흰 물결 속에 잠이 들었다. 저만치 앞에서, 꿈틀대는 오징어 다리에 걸린 얼굴들이 움직인다. 낯익은 젖은 얼굴들. 비에 젖은 낙엽처럼 오징어 다리에 붙어 길바닥을 훑는다.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이 몰려온다. 황혼에 약한 내 어린 낙타는 잠들어버렸다. 더 가까이, 익숙한 집들이 몰려와 앞을 막는다. 내가 살던 집과 태어나던 집과…… 혼자 웃던 집과 불태운 집, 몰래 숨긴 집과…… 함께 떠들던 집과 함께 떠난 집…… 함..

Review 2010.07.24

나는 네가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 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면 좋겠다. 인공 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

Review 2010.07.24

이끼

정재영 유해진 등 내노라하는 배우들 (특히 이름만 들어도 두근거리는 박해일님)의 출연 소식에 이끼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 높은 평점을 보거나 아는 사람으로부터 추천받아서 제멋대로의 '기대'를 안고 영화를 보면 제대로 감상도 못할 뿐더러 늘 기대 이하의 재미와 감동을 얻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마음을 덤덤하게 가라앉히고 영화를 보러 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덕분인지 아무튼 이끼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웹 상에서는 이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비판들도 많다. 웹툰을 본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에는 오히려 '강우석 코드'로 스토리가 탈바꿈된 덕분에 더 괜찮은 영화가 뽑아진 듯하다. 원작에 충실하다가 오히려 장르적인 차이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버려서 이도저도 아닌 어색한 스타일..

Review 2010.07.19

멋진 하루, 다이라 아스코

즐겁다라는 말은 굉장히 여러 가지의 뉘앙스로 쓰이는 것 같다.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의 '즐거운' 기분과, 비오는날 우산에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때의 '즐거운' 기분은 분명히 아주 다르니까. 그런 여러가지 복잡한 의미를 감안해서, 다이라 아스코의 소설을 읽으니 정말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사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던 것은 단지 전도연이 나왔던 영화의 원작 소설이라는 점만으로 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멋진 하루'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랑 '해바라기 마트의 가구야 공주'라는 단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 단편들이 좀 더 마음이 설레는 결말이었기 때문인것 같다. 비현실적이고 다소 유치한 판타지 속으로 빠져듦으로써 얻게 되는 즐거움도 있지만 비교적 충실하게 ..

Review 2010.07.16

고도 자본주의

모든 것은 면밀한 계획하에 진행되었다. 그것이 고도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가장 거액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가 가장 유효한 정보를 입수하며, 가장 유효한 이익을 얻게끔 된다. 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자본 투자라는 것은 그러한 것을 내포한 행위인 것이다. 자본 투자를 하는 자는 그 투자액에 상응한 유효성을 요구하게 된다. 중고차를 사는 사람이 타이어를 발로 걷어차고 엔진을 살펴보고 하듯이, 1천억의 자본을 투자하는 자는 그 투하의 유효성을 세세히 검토하는 것이며, 어떤 경우에는 조작도 하는 것이다. 그 세계에선 공정성 따위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지기에는 투자 자본의 액수가 너무 큰 것이다. 강압적인 일도 한다. 가령, 토지 매수에 응하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자. 예전부터 장사를..

Review 2010.06.20

태엽감는 새

왜냐하면 계시와 은총을 잃어버렸을 때 내 인생 또한 잃어버렸으니까. 예전에 내 속에 있었던 생명이나, 무엇이든 가치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 이젠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져 버렸소. 저 강렬한 빛 속에서 그것들은 불타 올라 재로 별해 버렸던 것이오. 그 계시와 은총이 발하는 열이 나라는 인간이 지닌 생명의 핵을 모두 태워버렸던 것이오. 그 열에 견딜 수 있는 정도의 힘을 내가 가지지 못했던 것이라오. 그러므로 나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소. 육체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나에게는 오히려 구제라고도 할 수 있소. 그것은 나라는 것에 대한 고통으로부터, 그 암울한 지옥으로부터 나를 영원히 해방시켜 주는 것이오. 또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구려. 용서하시오. 내가 정말로 오카다씨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오. 나는 내..

Review 2009.06.30

한밤중의 기차에 대하여, 혹은 이야기와 포옹에 대하여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에게 묻는다. "너는 나를 얼마나 좋아해?" 소년은 한참 생각하고 나서, 조용한 목소리로, "한 밤의 기적소리만큼" 이라고 대답한다. 소녀는 잠자코 이야기가 계속되기를 기다린다. 거기에는 틀림없이 무엇인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어느날, 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지." 그는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어. 아마 두 시나 세 시, 그쯤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몇 시인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어쨌든 그것은 한밤중이고, 나는 완전히 외톨이이고,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어. 알겠니? 상상해봐. 주위는 캄캄하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소리라고는 아무 것도 안 들려. 시계 바늘이 시간을 새기는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아 ─ 시계가 멈춰버렸는지도 모르지. 그리고 나는 갑자..

Review 2009.02.26

말이 표를 파는 세계

5월 7일 금요일 나는 아버지한테 "저어 아버지, 사람은 죽으면 어디로 가?"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전부터 그것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한 뒤에, "사람은 죽으면 말이 표를 파는 세계로 가서, 거기에서 말한테서 표를 사서 전차를 타고, 도시락을 먹지. 도시락에는 어묵과 다시마 말이와 양배추 다진 것이 들어있어." 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얘기에 대해서 한참 생각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왜 죽은 뒤에 어묵과 다시마 말이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다같이 특초밥을 주문해서 먹었었거든요. 그런데 어째서 죽은 사람은 어묵과 다시마 말이와 양배추 밖에 먹을 수 없는 것일까요? 그런 것은 불공평한 듯한 느낌이 듭니다. 내가 그렇..

Review 2009.02.26

은희경, 새의 선물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남의 시선을 싫어하게 된 것은. 한동안은 누가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엄마 이야기라고 지레 짐작했으며 남에게 그것을 눈치채이기 싫어서 짐짓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

Review 2008.12.26

11/13 빠에야 믹스타 후기

현대 예술의 중요한 사조 중 하나는 바로 ‘내러티브의 해체’이다. 뚜렷한 내러티브나 주제의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억지로 이해시키는 것은 어쩌면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이성적인 사유를 강요받는 데 지친 현대인들에게 이제 예술은 그 어떤 논리적 이해나 정답도 요구하지 않고 단지 ‘공감’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잠시 일상을 잊고서 짜릿한 일탈을 만끽할 수 있도록 하는 공연이다. 에서 선보이는 동작들은 낯설고 새로우면서도 동시에 왠지 익숙한 느낌을 전해준다. 그것은 이 공연의 안무가 스페인 전통 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졌으며, 스페인 전통 무용이 우리의 전통적 춤사위와 어떤 유사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그러한 전문적인 해설을 차치하더라도 에서 나타나는 ..

Review 2008.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