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396

메이드 인 팝랜드

확실히 가벼운 마음으로 친구나 연인, 가족들과 미술관에 가고 싶을 때는 팝아트전시전을 찾는 것이 좋다. 눈을 사로잡는 선명한 색감, 뚜렷한 윤곽의 팝아트 작품들을 보다 보면 탄산음료를 마시는 것처럼 기분이 상쾌해지기 때문이다. 또 작품의 내용들은 대개 머리 아프게 고민할 필요 없이 쉽게 소화되고, 작품 속에 녹아든 작가의 유머러스함을 이해한 관람객들로 하여금 가볍게 때로는 씁쓸하게 웃음짓게 한다. 미디어가 점점 더 자극적이 될 것을 요구받는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이렇게 우리에게 이미 친근해진 여러가지 시각적 장치들을 여전히 생각 없이 보고 웃고 떠들며 지나치면서, 관람객인 우리는 다시 한번 작가(혹은 사회)의 조롱이 된다. 이번 과천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되었던 전시 작품들은 전통적인 팝아트 개념으로 묶..

Review 2011.02.25

Media Landscape, Zone East

2010 Liverpool Biennial - Screening at LOOP · 전시기간: 2011년 2월 10일(목) ~ 2011년 2월 27일(일), 연중 무휴 · 전시시간: 11AM – 8PM · 장소: 대안공간 루프 · 참여작가 명단: [중국] - Hu Xiaoyuan, Ma Qiusha, Zhao Yao [일본] - Sakakibara Sumito, Taguchi Yukihiro, Taro Izumi [동남아] - Fong Silas(홍콩), Ho Tzu Nyen(싱가포르), JOMPET(인도네시아), Wu Chi-tsung(타이완) [한국] - 구정아, 김기라, 김영은, 뮌, 박준범, 신기운, 오경민, 이현철, 정유미, 천경우 · 전시소개글: 글/ 서진석 이번 2011년 2월 10일부터 18..

Review 2011.02.19

게으름과 수동적 여가에 탐닉하는 이유

게으름은 사람의 천성이 아니다. 목표가 없고 교감을 나눌 수 있는 타인이 없을 때 사람들은 차츰 의욕과 집중력을 잃기 시작한다. 마음은 자꾸만 흔들리고, 불안감만 조성하는 해결 불능의 문제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마음이 붕괴되는 이런 최악의 무질서 상태를 피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불안의 샘을 의식에서 지워주는 자극에 의존하게 된다. 그것은 드라마 시청일 수도 있고 연애 소설이나 추리 소설같은 판에 박힌 이야기를 읽는 것일 수도 있으며 도박이나 섹스에 빠지는 것일 수도 있고 술이나 마약에 탐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것들은 의식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짧은 시간 안에 줄여주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감과 불쾌감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몰입의 즐거움' 중에서 어쩌면 '마음의 무..

Review 2011.02.18

몰입의 즐거움

주옥같은 문장과 표현들 속에 담겨있는 작가의 '사람(의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 여타의 자기개발서를 읽는 것보다 더 나를 반성하게 하고 생활의 의지를 주는 책이다. · 일상의 구조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고 투자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시간을 묘사할 때 쓰는 예산·투자·할당·지출 같은 용어는 재무 분야에서 빌려온 것이다. 혹자는 그래서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는 편협한 자본주의의 색채가 짙게 배어있다고 주장한다. "시간은 돈"이라고 즐겨 말한 사람이 자본주의의 위대한 변호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이긴 하지만, 돈과 시간을 같게 보는 관점을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문화만이 아니라 인류..

Review 2011.02.18

SeMA, 이미지의 틈

'SeMA 2010_이미지의 틈'전은 젊은 작가들의 창작을 활성화하고 동시대 미술의 담론을 생산해 온 그간의 성과를 토대로 2000년대 동시대 미술의 지형을 더듬어봄과 동시에,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소통하는 기회로 삼기위해 기획되었다. 또한 본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지원한 역대 작가들(SeMA 2004~2008전, 난지창작스튜디오 1기~4기, 2008~2010 SeMA 신진작가 전시지원 프로그램 참여작가)의 작업에서 비교적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인 ‘이미지의 문제, 즉 시각성’을 주제로 설정하여 이를 다루는 작가들을 선별하여 소개하는 전시이다. 이미지가 지배하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미지를 현실 그 자체로 받아들이도록 시각적 트릭을 사용하여 유희적인 측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Part1. 이상한 거울_..

Review 2011.02.17

알랭 드 보통, KISS&TELL

1 이러한 상대성에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를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관찰자가 관찰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 관찰 대상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상황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하이젠베르크가 말한 것처럼 원자를 관찰하기 위해 현미경 렌즈를 조절하기 시작하면 관찰대상은 자기의식적으로 되고, 그에 따라 관찰대상은 관찰되지 않았을 때와는 다른 어떤 움직임을 시작할 것이다. 이것은, 누군가 망원경으로 몰래 훔쳐볼 때 거실 바닥에서 뒹굴고 싶었던 이들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음, 그렇다면 내가 집에서는 책 한페이지 안읽으면서 카페에서는 그렇게도 열심히 공부하는게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로 비유될 수도 있겠군요 단순히 커피 덕분인줄 알았더니, 제3자의 시선이 필요했던 것이었구만 2 주변에서 하도 알랭 드 보통..

Review 2011.02.09

이층의 악당

스릴러도 아닌것이 코메디라기도 좀 그런것이 어쨌든 빵터지는 재미나 눈물콧물 짜내는 감동코드는 없어도 참신한 소재와 오밀조밀한 재미를 담은 대사들로 보는 맛이 있었던 영화 이층의 악당 무엇보다 김혜수느님이 너무너무 매력적이어서 그저 넋을 놓고 봤다 히스테릭 우울증의 괴팍한 30대 중반 아줌마가 섹시해 보였던건, 오직 그녀가 김혜수였기 때문이다 ㅋㅋㅋㅋ

Review 2011.02.02

Memento Vita, 삶을 기억하라

사진 기록을 통해서 서울을 들여다보고, 서울에 대해 성찰해 보고 궁극적으로 서울에 서울을 되돌려주자는 (심히 거창한) 의의로 기획된 서울사진축제 전시기간: 2010년 12월 20일 (월) ~ 2011년 1월 31일 (월) 전시장소: 서울시립미술관 경희궁 분관 및 남서울 분관 사당역 근처 시립미술관 분관에서 사진전을 보고 왔다 분관의 전시 주제는 '삶을 기억하라' 사진을 통해 기록되고 기념된 개개인의 순간들, 그것이 곧 역사의 단면들임을 말한다. 여러 주제의 전시들 중에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두 가지 전시작; 먼저 지난 번에 moa에서도 전시되었던 장보윤의 다른 주제의, 다른 맥락의 공간 속에서 마주한 사진들은 지난 번보다 훨씬 더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전시 기획이라는 게, 큐레이터의 역할이라는 게 ..

Review 2011.01.26

부당거래

영화의 완성도나 퀄리티를 따지는 걸 떠나서 스토리 자체에 담겨져있는 논픽션의 메시지는 (새삼스럽지만서도)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부당함에 익숙해져서는 안된다는 것, 나에게 특히 그 의미는 더 무게감 있게 다가왔다. 건조한 현실 속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정립시켜야 할 것인가 나는 어떤 위치에 정립될 수 있을 것인가 어쨌든, 일단은 '정신차리고' 살아야겠다 세상 산다는 거 쉽지 않은 거니까 (이왕 제대로 살거라면) 가볍게 생각하지 말고 가벼이 하루하루 보내지 말고 이 젊은 날을 더 진정성 있게 살자구 좀.

Review 2011.01.22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 Game + Interactive Media Art

게임과 미디어 아트, 이들은 공통적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을 주체로 하고 자신을 객체로 뚜렷하게 위치시키는 일반적인 예술품들이나 상품과는 달리 이를 마주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각 외의 다중 감각을 동원하도록 하면서 보다 액티브한 상호 작용을 요구한다. 그러나 게임과 미디어 아트에 있어서 가장 확실한 차이점은, 게임은 참여자의 순간 순간의 즉각적인 반응 그리고 게임 속 세계에의 몰입을 필요로 하는 반면에 미디어 아트는 작품과 마주하는 사건을 일으킨 후에 반성적 사고를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서로 너무 닮아 있는 이 두 영역을, 상업성과 예술고립주의로 완전히 분리시켜 버리는 것이, 과연 적절한 조치일까,하는 물음을 던지는 데에서 시작되는 전 /주말에 모아미술관에 다녀왔다. '끝없이 두 갈래로 갈..

Review 2011.01.11

언더그라운드2 - 약속된 장소에서

그녀와 얘기를 나누다보면, 이 사람에게 옴진리교가 이상적인 '그릇'이었다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분명 '현세'에서 살아가는 것보다는 교단에 들어가서 수행하는 편이 이 사람으로서는 훨씬 행복했을 것이다. 현세의 그 무엇에서도 전혀 가치를 발견할 수 없었고, 자기 안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것 외에는 거의 흥미가 없었다. 따라서 현실에서 벗어나 외곬으로 정신수행에만 매진할 수 있는 옴진리교 교단은 하나의 낙원 같은 것이었다. 물로 열여섯 살에 교단에 들어가 순수 배양되었다고, '유괴'나 '세뇌' 같은 형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은 그보다는 오히려 '세상에 이런 사람 하나쯤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 쪽으로 기울어버렸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이 굳이 '현세'에서 부대끼며 절박하게 살아갈 필..

Review 2011.01.02

폐허의 도시

 배가 고프지 않았다면 걸음을 계속 옮기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부족한 것에 익숙해야 한다. 덜 원하고, 덜 만족하고, 덜 필요로 하면 부유해진다. 이 도시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로 이거다. 마음속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 버리는 것이 이 도시다. 살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하면서도 그 삶을 빼앗아 가려고 애쓰는 것이 이 도시다. 피할 도리가 없다. 아니, 피하든지 피하지 못하든지 둘 중의 하나다. 혹 지금은 피할 수 있다 해도 다음은 확신하지 못한다. 피하지 못하면, 그냥 그것으로 끝이다. 지금의 나는 굉장히 상식적이고 셈도 정확한 사람이 되었다. 여기의 다른 사람들처럼 되기는 싫다. 환상이 그들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본 나는 절대 환상을 그리지 않는다. 헛된 환상을 쫓는 사람들. 그들은 ..

Review 2010.12.27

쉿, 나의 세컨드는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인양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내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 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슬쩍 올리며 조용히 웃곤 할 것 밀교인 듯 나는야 세상의 이거야 이거 * 김경미, '쉿, 나의 세컨드는' 중에서 '식사법' 콩나물처럼 끝까지 익힌 마음일 것 쌀알빛 고요 한 톨도 흘리지 말 것 인내 속 아무 설탕의 경지 없어도 묵묵히 다 먹을 것 고통, 식빵처럼 가장자리 떼어버리지 말 것 성실의 딱 한가지 반찬만일 것 새삼 괜한 짓을 하는 것은 아닌지 제 명에나 못 죽는 건 아닌지 두려움과 후회의 돌들이 우두둑..

Review 2010.12.14

달의 궁전

내가 어디에 있건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을 거야. 당분간 우리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떠나겠지. 하지만 조만간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거다. 난 그러리라고 믿는다. 너도 알 테지만 결국에는 모든 일이 다 잘 풀리고, 모든 일이 다 연결될 거야. 아홉 행성의 궤도, 아홉 행성들, 아홉 번의 이닝, 아홉 번의 삶. 그걸 생각만 해 봐라. 조화는 끝이 없다. 하지만 이 실없는 소리는 하룻밤으로 충분해. 이제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잠이 우리 모두를 부르고 있다. 자, 손을 내밀어 봐라. 그래, 바로 그거다. 아주 단단히 쥐고, 그렇게. 자, 이제 흔들자. 그래, 됐다. 작별의 악수. 우리를 끝까지 지탱해 줄 악수. 폴 오스터, '달의 궁전' 중에서 하지만 그들은 다시는 만나지 못했는걸

Review 2010.12.11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팬시점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펜들 중에 마음에 드는 색깔 몇 가지를 골라내는 것 같은 기분으로 무라카미-왠지 하루키보다는 '무라카미'의 어감이 좋은-의 '한없이 슬프고 외로운 영혼에게' 중에서 동그라미쳐 둔 몇 가지 이야기들 52 옛 친구가 보낸 한 통의 편지, 결혼 청첩장이 나를 오래된 거리로 되돌아가게 한다. 나는 이틀 간의 휴가를 얻어서 호텔방을 예약한다. 나는 거기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무엇인가 이상한 기분이다. 몸의 절반이 투명하게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마치 내가 내 몸에서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된다. 12년 전에 나는 에 애인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이 방학을 하면 나는 슈트케이스에 짐을 넣고 신간센의 새벽 첫차를 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서 책을 읽고 풍경 같지도 않은 풍경을 ..

Review 2010.12.09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사람은 타인의 시선에 의해 제 2의 자신, 밖에서 본 자신이라는 존재를 완성해 간다. 사람은 보이는 것, 연기하는 것에서 쾌감을 느낀다. 소설, 드라마, 게임. 전에 없을 정도로 허구가 소비되고 있는 이 시대, 자신을 허구 안의 등장인물로 간주하는 것이 큰 오락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이다. 일찍이 그것은 은밀한 재미였다. 영화나 소설 속의 주인공에게 감정이입함으로써 사람들은 타인의 인생을 상상했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당당하게 타인이 되기를 원한다. 드라마 속의 주인공이 예전의 대스타에서 자신과 비슷한 타입의 사람으로 바뀌면서부터 자기도 히로인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무대인 도회지를 보라. 아오야마, 긴자, 롯폰기. 젊은 여자들을 비롯하여 '보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꾸..

Review 2010.12.01

FIGHTING

"넌 정말 강해. 나 같은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간이 강하면 얼마나 강하고, 또 약하면 얼마나 약하겠는가. 그런 건 다 종이 한 장 차이다.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손목에 붕대를 감고 있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어 입을 다물었다. 이시다 이라, 중에서 똑 부러지는 멋진 선배한테 충고를 받은 듯한 느낌 지금 내 나이 정도에 이 책을 접하게 되어서 다행이다 그러니 나도 징징대지만 말고, do action

Review 2010.11.02

학생의 아내

"난 맛있는 음식, 스테이크, 기름에 지진 감자, 그런 게 좋아. 좋은 책과 잡지, 밤에 기차 타는 거, 비행기를 타는 걸 좋아해." 그녀는 잠시 멈추었다. "물론 이건 좋아하는 순서로 말한 건 아니야. 좋아하는 순서대로 말하라고 하면 생각을 해봐야 해. 그렇지만 나는 그게 좋아, 비행기 타고 가는 거. 이륙할 때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다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어." 그녀는 한쪽 다리를 그의 복사뼈 위에 걸쳤다. "나는 밤늦게까지 깨어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 침대에 그냥 누워 있는 걸 좋아해. 우리가 늘 그럴 수 있으면 좋겠어, 어쩌다 한번씩이 아니라. 그리고 난 섹스가 좋아. 기대하지 않고 있을 때 이따금씩 날 쓰다듬어주는 것도 좋고. 영화관 가는 것, 영화 보고 나서 친구들과 맥주 마시는 것도 ..

Review 2010.10.02

보르헤스

"나는 너의 기억의 깊은 곳, 꿈들의 조수 속에 머무르겠지" 그(또 다른 나)는 말을 멈추었고, 나는 그(또 다른 나)가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보면 나 또한 그와 함께 죽었을 것이었다. 슬픔에 빠진 나는 베개를 쓸어보았다. 거기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나는 방을 빠져나갔다. 밖에는 정원도, 대리석 층계도, 고적한 저택도, 유카리나무들도, 동상들도, 광장도, 우물들도, 아드로게 마을에 있는 농장 철책의 현관문도 없었다.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또 다른 꿈들이었다. - 1983년 8월 25일, 끝부분에서 보르헤스는 1983년 4월 27일 지에 기고한 위의 단편에서 바로 그 날, 1983년 8월 25일 자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8월 25일을 선택한 것은 그의 생일이 8월 24일이기..

Review 2010.09.28

데미안을 꾸역꾸역 다 읽긴 했다만

1. "우리는 너무 많이 얘기한단 말야." 그는 유난히 정색을 하고 말했다. "약삭빠른 이야기는 아무 가치가 없는 거야. 아무 가치가 없어.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갈 뿐이지. 자기 자신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는 것은 죄악이야. 사람이란 마치 거북이처럼 자기 자신 안으로 완전히 기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거든." 데미안에서 가장, 그리고 유일하게 마음에 들었던 부분. '데미안'을 다 읽었다. 아프락시스 이야기까지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었다. 선과 악이란 동전의 양면 같은 상호 불가분의 것이라는 걸 참 거창하게 이야기한다 싶었지만 아직 유년의 이야기이니까,라고 생각하면서 읽었다. 하지만 데미안이 어설픈 방탕의 길로 빠져드는 부분부터는 도저히 소설 속의 어떤 인물에게도 공감할 수 없어서 인상을 팍 쓰고 삐딱..

Review 2010.09.21

브리지파트너

한정희 단편소설집 브리지파트너 소설을 '수다떠는 기분으로' 읽는 걸 좋아한다. 정말 그래, 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것들이 완벽한 표현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에 감탄하면서. 고등학교 때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처음 읽었던 뒤로 소통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취향이 되어 버렸는데 솔직히 말해서 하루키만큼 '묵직하고 완벽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준 작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며칠전 학교 도서관에서 별 기대없이 '브리지파트너'라는 소설을 집어들어 읽었다. 오랜만에 만난, 거의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이야기들이었다. 말투, 단어의 어감, 표현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던. 웃으면서 죽는 법 중에서 그녀에게는 남다른 직관이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하면..

Review 2010.08.13

백색의 봄

모든 존재는 무한한 은유를 내포하고 있으며, 다의적이다 그건 보통은 잊고 살기 마련인 사실. 마주치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 존재를 지극히 보편적으로(무심하게) 규정지음으로써 그를 종종 훼손시키는 것이다. '백색의 봄' 전시에서는 선과 면, 빛과 음영 다양한 작품들마다 모두 다른 방법으로, 제각각의 의미로 백색의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었다. 순수함, 자유로움, 가벼움, 모호함, 깊이의 결여 (또는 무한한 깊이) 가녀림 (또는 모호함) 때문에 오히려 밟아서 때를 묻히거나 손에 쥐고 힘주어 뭉그러 뜨리고 싶어지는 것 '때묻은' 백색, 그 불완전함에서 오는 불쾌함 순간적인 경험으로 얻어지는 빛의 이미지 (우리의 경험이 '시간'에 의지하는 한) 경험되는 '실체'라는 것은 유약할 수밖에 없음 백색의 일상적인 물체..

Review 2010.07.29

안개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덜컥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고 그녀는 걱정한다. 창밖엔 안개가 짙다. 내 어린 낙타는 벌써 잠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집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저녁. 살아 있는 집과 죽은 집, 불 켜진 집과 꺼진 집. 모든 집들이 모여 긴 오징어 다리를 달고 흐느적흐느적 헤엄치는 흰 물결 속에 잠이 들었다. 저만치 앞에서, 꿈틀대는 오징어 다리에 걸린 얼굴들이 움직인다. 낯익은 젖은 얼굴들. 비에 젖은 낙엽처럼 오징어 다리에 붙어 길바닥을 훑는다.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이 몰려온다. 황혼에 약한 내 어린 낙타는 잠들어버렸다. 더 가까이, 익숙한 집들이 몰려와 앞을 막는다. 내가 살던 집과 태어나던 집과…… 혼자 웃던 집과 불태운 집, 몰래 숨긴 집과…… 함께 떠들던 집과 함께 떠난 집…… 함..

Review 2010.07.24

나는 네가

나는 네가 시냇물을 보면서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냇물이 흐르다가 여기까지 넘쳐 와도 화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목련나무 앞에서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흰 목련 꽃잎들이 우르르 떨어져도 웃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밤 고양이를 만나도 겁먹지 않았으면 좋겠다 밤 고양이가 네 발목을 물어도 그냥 그대로 서 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꿈꾸지 않았으면 좋겠다. 창밖의 봄볕 때문에 잠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꿈속에서 영롱한 바닷속을 헤엄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인공 딸기향이 가득 든 고무지우개면 좋겠다. 인공 딸기향을 넣은 딱딱한 고무로 만든 그런 치마만 삼백육십육일 입었으면 좋겠다 나는 네가 오래도록 우울하면 좋겠다 아무도 치료할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도 나는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

Review 2010.07.24

이끼

정재영 유해진 등 내노라하는 배우들 (특히 이름만 들어도 두근거리는 박해일님)의 출연 소식에 이끼를 보러 영화관에 갔다. 높은 평점을 보거나 아는 사람으로부터 추천받아서 제멋대로의 '기대'를 안고 영화를 보면 제대로 감상도 못할 뿐더러 늘 기대 이하의 재미와 감동을 얻게 된다. 그래서 최대한 마음을 덤덤하게 가라앉히고 영화를 보러 가는 버릇이 생겼다. 그런 덕분인지 아무튼 이끼는 기대 이상으로 재미있었다. 그런데 웹 상에서는 이 영화가 원작의 내용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는 비판들도 많다. 웹툰을 본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에는 오히려 '강우석 코드'로 스토리가 탈바꿈된 덕분에 더 괜찮은 영화가 뽑아진 듯하다. 원작에 충실하다가 오히려 장르적인 차이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버려서 이도저도 아닌 어색한 스타일..

Review 2010.07.19

멋진 하루, 다이라 아스코

즐겁다라는 말은 굉장히 여러 가지의 뉘앙스로 쓰이는 것 같다. 놀이공원에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의 '즐거운' 기분과, 비오는날 우산에 타닥타닥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때의 '즐거운' 기분은 분명히 아주 다르니까. 그런 여러가지 복잡한 의미를 감안해서, 다이라 아스코의 소설을 읽으니 정말 즐거운 기분이 되었다. 사실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렸던 것은 단지 전도연이 나왔던 영화의 원작 소설이라는 점만으로 끌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멋진 하루'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랑 '해바라기 마트의 가구야 공주'라는 단편이 더 마음에 들었다. 이 단편들이 좀 더 마음이 설레는 결말이었기 때문인것 같다. 비현실적이고 다소 유치한 판타지 속으로 빠져듦으로써 얻게 되는 즐거움도 있지만 비교적 충실하게 ..

Review 2010.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