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옥같은 문장과 표현들 속에 담겨있는 작가의 '사람(의 심리)'에 대한 깊은 통찰.
여타의 자기개발서를 읽는 것보다 더 나를 반성하게 하고 생활의 의지를 주는 책이다.
여타의 자기개발서를 읽는 것보다 더 나를 반성하게 하고 생활의 의지를 주는 책이다.
· 일상의 구조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삶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경험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할당하고 투자할 것인가를 지혜롭게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시간을 묘사할 때 쓰는 예산·투자·할당·지출 같은 용어는 재무 분야에서 빌려온 것이다. 혹자는 그래서 시간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는 편협한 자본주의의 색채가 짙게 배어있다고 주장한다. "시간은 돈"이라고 즐겨 말한 사람이 자본주의의 위대한 변호가였던 벤저민 프랭클린이긴 하지만, 돈과 시간을 같게 보는 관점을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그것은 자본주의 문화만이 아니라 인류 공동의 경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돈이 시간의 가치를 낳는 게 아니라 시간이 돈의 가치를 낳는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지 않는가. 무엇을 하거나 만드는 데 들어가는 시간을 측정하는 잣대 노릇을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우리가 돈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간을 주어 삶의 제약에서 우리를 어느 정도 해방시키기 때문이다.
· 경험의 내용
내적 동기 부여(이것을 하고 싶다)든 외적 동기 부여(이것을 해야 한다)든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 집중을 해야 할 어떤 목표도 갖지 못하고 마지못해 일을 하는 상태보다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준다.
의식이 경험으로 꽉 차 있는, 즉 느끼는 것과 바라는 것과 생각하는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예외적인 순간이 바로 '몰입(沒入) 경험'이다. '몰입'은 삶이 고조되는 순간에 물 흐르듯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느낌을 표현하는 말이다.
우리는 적절한 대응을 요구하는, 일련의 명확한 목표가 앞에 있을 때 몰입할 가능성이 높다. 체스나 테니스, 포커 같은 게임을 할 때 몰입하기 쉬운 이유는 목표와 규칙이 명확히 설정되어 있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 생활과 달리 몰입 활동은 명확하고 모순되지 않은 목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해준다.
몰입 활동의 또 하나 특징은 피드백의 효과가 빨리 나타난다는 것이다. 몰입 활동은 작업이 얼마나 순조롭게 이루어지는지를 말해 준다. 우리는 체스를 두면서 말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형세가 유리해졌는지 불리해졌는지를 안다.
또한 몰입은,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버겁지도 않은 과제를 극복하는 데 한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온통 쏟아부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행동력과 기회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질 때 우리는 바람직한 경험을 하게 된다. 몰입 경험은 불안과 권태로 가득한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나는 강렬한 삶을 선사한다.
삶을 훌륭하게 가꾸어주는 것은 행복감이 아니라 깊이 빠져드는 몰입이다. 사실 몰입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 행복을 느끼려면 내면의 상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고, 그러다 보면 정작 눈앞의 일을 소홀히 다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체험을 되돌아보면서 비로소 행복을 느낀다. 몰입에 뒤이어 오는 행복감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든 것인만큼 우리의 의식을 그만큼 고양시키고 성숙시킨다.
보다 강력한 몰입을 위해서는 실력 연마에 좀더 힘을 쏟거나 과제의 수준을 높여야 하기 때문에 몰입 경험은 배움으로 이끄는 힘이다. 새로운 수준의 과제와 실력으로 올라가게 만드는 힘이다. 이상적으로 보면 사람은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기면서도 꾸준한 성장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몰입의 단계로 넘어가기에는 권태와 무력감이 너무 강하여 비디오처럼 이미 나와 있는 규격화된 자극으로 우리의 정신을 채우거나, 필요한 실력을 닦기도 전에 지레 겁부터 집어먹고 마약이나 술 같은 인위적 이완제가 가져다 주는 몽롱한 상태로 가라앉는다. 최적의 경험을 하려면 힘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첫발을 내디딜 기운조차 없는 경우가 흔하다.
· 일과 감정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면 먼저 가장 보람찬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루의 활동을 설계해야 한다. 말만 쉬운게 아닌가 싶을 수 있지만, 예컨대 밤에 일기를 적거나 하루의 일과를 반성하는 버릇을 들이면 내 기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과연 무엇인지를 차분히 추려낼 수 있다.
즉 삶의 질을 끌어올리려면 먼저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어떤 활동, 어떤 장소, 어떤 시간, 어떤 사람 옆에서 우리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를 포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나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찾아내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 일의 역설
흔히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목표 의식과 도전 의식이 없이는, 자기 절제가 아주 뛰어난 극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의미있는 삶을 누리기에 충분할 만큼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기가 어렵다.
일은 게임·운동·음악·예술처럼 몰입할 수 있고 보상이 따르는 활동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일을 통해 느끼는 경험의 질이 예상 밖으로 긍정적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회만 있으면 일을 줄이려고 한다. 왜 그럴까?
첫째로 들 수 있는 이유는 일의 객관적 조건이다. 아득한 옛날부터, 돈을 주고 사람을 고용한 이는 자기가 부리는 사람의 복리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적 자원을 유달리 강조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도 경영진은 직원들이 일을 통해 얻는 체험의 질에 무관심한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러니 많은 근로자들이 삶의 본질적 보상을 일에서 기대하지 않고 공장 문이나 사무실 문은 나서야 비로소 행복한 시간을 맛볼 수 있다―사실은 그렇지도 않지만―고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둘째 이유는, 첫째 이유와 맞물려 있지만, 오늘의 현실에서 비롯되었다기보다는 역사적으로 일을 천시해 온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 의식은 문화에 의해 전승되고 개인이 성장하면서 학습된다. 산업혁명기에 공장 노동자들은 비인간적 조건 아래 일하면서 여가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기 때문에 자유시간만 많아지면 저절로 행복해질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여가 시간은 행복의 필요조건일 수 있지만, 여가 시간 그 자체가 행복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 여가는 기회이며 동시에 함정
몰입할 수 있는 활동은 하나같이 처음에 어느 정도 집중력을 쏟아 부어야 그 다음부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복잡한 활동을 즐기려면 그러한 '시동 에너지'를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너무 피곤하거나 너무 불안하거나 혹은 처음의 그런 장벽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은, 재미는 덜하더라도 더 편하게 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족할 것이다.
바로 이 틈새를 비집고 '수동적 여가' 활동이 들어온다. 친구들과 시시덕거리거나 부담 없는 내용의 책을 읽거나 TV를 켜는 동작은 처음부터 특별한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실력이나 집중력이 필요하지도 않다. 몰입을 낳는 활동은 그만큼 까다롭고 어려워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 때가 자주 있다. 이와 달리 수동적 여가활동은 불안을 거의 낳지 않는다. 그것은 대체로 사람을 이완시키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활동이다. 여가 시간을 수동적 활동으로 채우면 아주 즐겁지는 않아도 어쨌든 골치 아픈 상황을 피해갈 수 있다.
· 삶의 패턴을 바꾼다
최근 들어 사람은 천성적으로 낙천적 기질, 비관적 기질을 타고나며 그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려고 노력해 봐야 소용없다는 주장을 펴는 글이 많이 나오고 있다. 만약 이런 주장이 사실이라면 사람이 자신의 삶의 질을 바꾸려고 애쓰는 모든 노력은 헛수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정론에 치우친 이 시나리오는 행복으로 종종 오해되어 받아들여지곤 하는 쾌활함을 행복의 척도로 삼을 때만 옳다. 만일 우리가 몰입 경험에서 맛볼 수 있는, 밖으로 전혀 두드러지지 않는 내면의 즐거움을 진정한 행복이라고 말한다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사소한 변화에 주목하면 위대한 발견을 낳을 수 있는 것처럼, 조금만 태도를 바꾸면 지긋지긋하고 넌더리나던 일이 빨리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기다려지는 환상적 활동으로 변모한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첫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이해하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둘째, 지금의 방식이 업무에 임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수동적 자세에서 탈피해야 한다. 셋째, 대안을 모색하면서 더 좋은 방법이 나타날 때까지 실험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보통 사람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겠다 싶은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는 게 사실이고, 그 불안에서 어떻게 해서든 벗어나려고 애쓰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상황을 이해하고 자신의 실력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주관적 평가의 차원이며 그러한 평가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인생을 살다 보면 부담스러운 처지에 놓일 때가 많다. 직장 생활에서도 부담스러운 상황을 맞이하긴 마찬가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에 직면할 때도 있지만 주위의 턱없이 높은 기대와 도저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난제들도 가슴을 짓누른다. 여기서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맨 먼저 취해야 할 조치는 머리를 어지럽히는 각종 요구들 속에서 우선 순위를 매기는 일이다. 책임 있는 지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구별하는 능력이 정말 중요하다. 일을 잘 하는 사람은 자기가 처리해야 하는 사항을 메모로 조목조목 정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그들은 메모를 보면서 남에게 맡기거나 잊어버릴 일이 무엇이고 직접 처리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어떤 순서로 처리해야 할지를 재빨리 결정한다. 때로는 이런 활동이 의식(儀式)의 형태를 띠기도 한다. 모든 의식이 그렇듯이 메모 행위도 자신이 상황을 잘 제어하고 있다는 심리적 위안을 준다.
머리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요구들 속에다 질서를 세우는 일은 스트레스를 방지하기 위한 긴 여정의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다음은 처리해야 할 일의 성격과 자기 실력을 면밀히 비교하는 단계로 들어간다.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작업이 있게 마련이다. 그 일을 남에게 맡길 수 있는가? 주어진 시간 안에 필요한 실력을 습득할 수 있는가? 누군가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가? 그 일을 단순하게 변형시키거나 쪼갤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하나라도 답을 얻을 수 있으면 스트레스만 잔뜩 안겨줄 것으로 예상되었던 상황이 몰입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탈바꿈된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상황에 자꾸만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일처리에 순서를 정하고 일을 끝내는 데 필요한 내용을 분석하며 해결 전략을 수립하는 데 좀더 관심을 쏟아야 한다. 통제력을 잃지 않아야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 자기목적성을 가진 사람
관심의 방향을 좌우하는 힘은 유전 명령과 사회 관습, 우리가 어릴 적에 익힌 버릇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알게 되고 우리 의식에 어떤 정보가 들어올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역은 나 자신이 아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오래 전에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우리는 봐야 하는 대로 보는 타성, 기억해야 하는 대로 기억하는 타성,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신을 숭배하는 사람에 대해서나 박쥐나 국기에 대해서 느껴야 하는 대로 느끼는 타성에 젖어 있다. 인생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각도 그런 타성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생물학과 문화가 정해 놓은 교본을 점점 더 그대로 따라간다는 점이다. 삶의 지배권을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 자신의 의지가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을 기울이는 요령을 터득하는 것이다.
· 운명애
자아상에는 맹점이 있다. 어린 시절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이 자아상은 곧바로 의식 전체를 지배할 가능성이 높다. 경직된 자아상에 자기를 비끄러맨 나머지 자아는 의식의 여러 내용 중에서 중요한 한 가지라는 인식에 머물지 않고, 관심을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적지 않다. 문제는 우리가 머릿속으로 지어낸 가공의 대상을 만족시키기 위해 온 정력을 쏟아붓는다는 점이다. 사실 우리가 만든 자아가 합리성을 가지고 있다면 문제될 건 없다. 그러나 고삐 풀린 탐욕의 노예가 되어버린 자아, 턱없이 과대망상증에 걸려든 자아가 엄연히 우리 현실 속에 존재한다. 그런 삐뚤어진 자아를 가진 사람은 자아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급급하면서 살아간다. 자아가 권력, 돈, 사랑, 모험을 요구한다 싶으면 그들은 궁극적으로 자기에게 무엇이 더 좋은지는 염두에 두지 않고 눈앞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이처럼 빗나간 자아의 요구에 정력이 놀아나면 의식만이 아니라 주변 상황도 어지럽히게 마련이다.
자아 감각이 없는 동물은 생물학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면 그 선에서 멈춘다. 먹이감을 덮치고 영토를 지키고 짝짓기 싸움을 벌이지만 당장의 욕구가 충족되면 휴식을 취한다. 그러나 권력이나 재산에 뿌리를 둔 자아상을 발전시킨 인간은 끝없이 이익을 탐한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건강이 상하고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게 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아가 설정한 목표를 무자비하게 추구한다.
우리 내부에 깃든 어둠의 정체-자아의 '쓰레기 같은 부분'-를 깨달았으면 그것을 더이상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 어둠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우리의 환상에서 비롯된 그 어둠의 오만무쌍함 앞에서 웃을 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 우리가 바라는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한 그 게걸스러운 욕망을 살려주어서는 안된다.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는 게 좋다. 목표를 달성하는 게 중요해서라기보다는 목표가 없으면 한곳으로 정신을 집중하기가 어렵고 그만큼 산만해지기 쉽기 때문이다. 자기가 세운 목표에 합당한 일을 하는 동안에는 설령 몰입은 경험하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개운해진다는 걸 입증하는 예는 얼마든지 있다. 반면에 아무리 하기 싫은 일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라는 생각이 들면 덜 괴롭다.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가장 손쉬운 길은 주인 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우리가 하는 일 대부분은 어쩔 수 없이 의무감 때문에 하는 일, 혹은 달리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하는 일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저 실 가는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느끼고 살아간다. 그런 입장에 놓이면 아까운 정력을 탕진하고 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진해서 원하는 일을 늘려야 한다. 무엇을 원한다는 사소한 마음의 움직임이 집중력을 높이고 의식을 명료하게 만들며 내면의 조화를 이루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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