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0 이하의 날들

유연하고단단하게 2020. 4. 10. 10:42

 

또 한편, 내가 소설을 읽고 쓰기 시작한 근원에 하루키가 있다는 것은 내가 그 이전의 문학의 풍경이 어땠는지를 모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건 내가 문학이 살아 있던 시기를 목격한 적이 없다는 뜻이 된다. 나에게 문학이란 언제 철거될지 모르는 낡은 동상 혹은 시체 안치소 한구석 아무도 찾아가지 않는 신원미상의 시체였다. 그런데 일본의 평론가 카라타니 코오진에 따르면 과거 문학은 세계 전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떠밭음으로써 한갓 소설나부랭이에서 그 이상의 것으로 도약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때 사람들은 문학을 통해 현실에 직접적인 변화를 이루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어쩌면 그래서 나를 포함한 사람들이 소설을 잘 읽지 않는 것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요즘 쓰이는 소설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일종의 '하찮음'이다. 모든 게 너무 하찮다. 이 '하찮음'이란 소설의 객관적 완성도나 나의 개인적 취향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은 특정한 종류의 야망이 부재한다는 뜻이다. 거기엔 세계에 대한 총체적 관심이나 변화에 대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그저 내용과 스타일 모두에서 과거의 것을 답습하고만 있다. 한마디로 요즘 우리의 삶을 전혀 담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는 대신 차라리 딱딱한 학술서들을 집어들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엔 소설의 세계에선 이제 더이상 찾아볼 수 없는 야망이 아직 잔존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어떤 사람들은 지금의 세계에 절망하고, 더 나은 세계를 그리고자 한다. 그런 글들이 갖는 절박한 의지, 현실과 가능성 사이에서 한발씩 전진하기 위해 애쓰는 투쟁의 장면은 요즘 쓰이는 웬만한 소설보다 더 문학적인 아우라를 갖는다. 확실히, 요즘 소설은 지고 있다.

 

김사과, <0 이하의 날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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