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 better tmr's 1132

책 / 진주의 결말

누군가를 이해하려 한다고 말할 때 선생님은 정말로 상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그동안 제가 만난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는 것이면서 그게 타인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글을 써대는 저를 보고는 이상한 애야, 라고 간단하게 이해해버렸겠지요. 아빠는 제가 쓴 문장들에 줄을 그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어떤 생각이든 할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네가 아니야. 너는 이 생각들에 줄을 긋는 사람이야. 네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 겁먹지 말고 가만히 지켜봐. 그다음에 너는 그 생각에 줄을 그어 지울 수 있어. 지금은 공책에 써서 지우지만, 나중에는 머릿속에..

Review 2023.11.30

책 / 연희동의 밤

- 나는 나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대꾸했다. 아마도 내 마음 속에선 그보단 아름다운 노래이기 때문이겠지. 뭐든 그렇잖아. 마음속에서 꺼내어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순간 갑자기 초라해 보이잖아. 분명히 그보단 아름다웠는데. 그래서 나는 사람들 앞에 소중한 걸 꺼내놓지 않아. 언니는 그게 좋은 건 아니라고 하더니, 내게 마음을 좀 열고 살라고 했다. 나는 언니가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나 싶었지만 잠자코 있었다. 우리는 종종 서로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마음이 서로를 무시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 서로를 보살피는 상황으로 이어지는 게 신기했다. 언니는 알코올램프를 살짝 살짝 흔들며 심지에 붙은 불꽃을 바라보았다. 가끔 드라마 속 인물이 부러워. 모두가 기억해주는 삶을 살잖아. 가짜인..

Review 2023.11.19

책 / 미조의 시대

- 낙성대역 인근 전셋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얼추 맞았고, 위치도 좋았다. 물론 반지하였지만. 언니 말대로 5천만 원으론 지상의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곁에서 함께 부동산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엄마는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제 빨래를 어떻게 말린다니. 엄마는 빨래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고작 빨래 문제만 걱정하는 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빨래방 가서 건조기로 말리면 되니까 걱정 마. 어딜 가든 살아. 다 마찬가지야. 나는 수영 언니나 할 법한 말을 엄마에게 해주었다. - 중증 우울증 판정을 받았을 때 엄마에게 노트북을 가져다주며 뭐든 써보라고 했다.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다독이는 습관이 있었기에 엄마도 그렇게 해보길 바라서였다. 그러나 엄마는 긴 글은 쓰기 싫어했고, 단상 같은 것을 기록하..

Review 2023.11.13

넷플릭스 / 서부전선이상없다

국가 혹은 전체를 위한다는 대의를 명분으로 개체를 무시하는 데서 비극은 일어난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과연 값진 일인가? 그 어떤 희생에도 당의성이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게 그냥 살인이고 자살일 뿐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날 과연 국가는 개인을 보호하고 질서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물론 국가의 순기능은 결코 무시할 수 없고 다른 시스템적 대안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국가는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스스로를 살찌우고 융성하기 위해 타자와 심지어는 국가 내부의 개체들까지 파괴한다. 그리고 공권력을 쥔 사람들은 대개 선의가 아닌 사익을 위해 국가를 명분으로 내세운다. +) 전쟁은 결코 단순한 오락이나 자극으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전쟁을 소재로 한 엔터테인먼트 상품..

Review 2023.11.13

책 / 기억의 뇌과학

Part 1. 기억의 과학 - 어떤 기억이건 생성되려면 반드시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쇼핑센터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주차 구역이 어디인지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 나중에 차를 찾느라 애를 먹겠지만 이것은 주차한 위치를 잊어서가 아니다. 이 경우 엄밀히 말하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애초에 주차 위치에 대한 기억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을 뿐이다. - “그 초여름 밤 생각나? 굴이랑 스모어를 먹으면서 레이디 가가의 노래를 들었잖아. 애들이 해변에서 축구를 했는데 막내 수지가 해파리에 쏘였었지”라는 기억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각각의 경험에 대응해 서로 무관하게 일어나던 신경 활동이 하나의 패턴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후 신경세포들 간의 연결 구조가 변화하면서 이 패턴은 지속성을..

Review 2023.10.24

책 / 아가씨 유정도 하지

‘나는 항상 상대의 잘못을 탓하기보다는 책임을 지는 쪽을 선호합니다. 나 자신을 희생자로 보는 게 정말 싫어요. 차라리 뭐랄까, 내가 이 사람과 사랑에 빠지기를 선택했는데 알고 보니 개새끼였어, 이렇게 말하는 게 나아요. 그건 ‘내가 한’ 선택이었으니까요.’ 이것은 내가 육 년 전 뉴욕 여행에 갖고 갔었던 책의 한 구절이다. 그 책에서 왜 이 부분이 적힌 페이지를 접어놓았는지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여행이란 죽음의 예행연습이라는 어머니의 말은 잊히지 않는다. 그 여행 내내 어머니는 검은색 수첩을 갖고 다녔고 그 안에는 빛바랜 내 신춘문예 당선 기사가 간직돼 있었다. 코니아일랜드에 함께 갔던 여성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 수첩은 이제 내가 갖게 되었다. 이따금 나의 가..

Review 2023.10.18

책 / 우리는 왜 얼마 동안 어디에

- 자전거의 가격이나 사양, 무엇보다 마이크가 거기에 들인 정성에 대해서는 민영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마이크는 무엇이든 원하는 걸 갖기까지 신중하고 가진 다음부터는 소중히 관리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상실감은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지만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해야 할 때 편하다는 이유로 가까운 사람에게 그것을 전가하는 건 안이하고 옹졸한 태도였다. - 내세울 만한 스펙이 별로 없는 승아는 자기소개서를 쓸 때마다 글솜씨로 곧잘 자신을 포장하곤 했다. 그녀가 내세우는 장점은 주로 성실성과 적응력이었다. 그런데 무언가가 있다고 강조하는 건 원하는 다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이기 십상이다. 승아가 생각할 때 그것은 도전 정신과 창의력 같은 것이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고 할 수 있어!라고 하기..

Review 2023.10.17

책 / 예순 살, 나는 또 깨꽃이 되어

- 삼촌은 원래가 호탕한 성격이라 말투도 행동도 거침이 없어 때로는 적을 만들기도 했지만, 누구보다 사랑이 참 많았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랐지만 오빠들은 어머니가 계셨다. 삼촌은 부모가 없었으니 마음 기댈 곳도 없었으리라. 부모 없이 형수 손에 자란 삼촌은 막내임에도 집안 대소사에 앞장섰다. 심성이 곧고 사랑이 많았기 때문이다. 누구의 시선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생각에 올바르다고 여기면 그에 충실히 따랐다. 나는 안다, 결핍이 사람을 망치기도 하지만 성장시키기도 한다는 걸. -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어머니, 저 막둥이 순자에요. 그곳에서 평안하신지요? 내일이 추석이라 그런지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젯밤 꿈에 어머니를 뵈었어요. 어린 제 손을 잡고 시골길을 걸어가시다 엄지만 한 ..

Review 2023.09.30

책 / 2023 트렌드코리아

1. Redistribution of average ‘평균’이 사라지고 있다. 정확히 표현하면 집단을 대표하는 평균값이 무의미해지고 있다. 대푯값으로서 평균이 의미 있으려면 해당 모집단이 정규분포를 이뤄야 하는데,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분포의 정규성이 크게 왜곡되고 있기 때문이다. 평균이 기준성을 상실하는 경우는 ① 양극단으로 몰리는 ‘양극화’, ② 개별값이 산재散在하는 ‘N극화’, ③ 한쪽으로 쏠리는 ‘단극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러한 ‘평균 실종’ 트렌드의 배경은 구조적이고 추세적이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속성을 지니는데, 코로나19 팬데믹이 2년 넘도록 차별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경제·사회·교육·문화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양극화가 가속화됐다. 각종 소셜미디어를..

Review 2023.08.26

책 / 2022 트렌드코리아

1. 나노사회로의 전환 - 갈등과 분열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그간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했던 세계는 자원, 외교, 안보를 중심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 시장에서도 나노타깃을 대상으로 하는 ‘나노시장’ 현상이 두드러졌다. 나노시장은 두 가지 형태로 전개됐다. 첫째, 타깃이 작아지다 못해 나노 단위로 쪼개지는 ‘나노타깃팅’이다. 1명의 소비자가 1개의 시장을 넘어 0.1개의 시장으로 규정되면서 개인과 맥락을 최적화하는 초개인화 기술도 함께 성장했다. 둘째, 타깃의 미세화에 따라 산업 형태도 소형화됐다. 개인 간 물건을 거래하는 플랫폼이 성장하고, 소비자의 선호를 기반으로 신속하게 생산·판매하는 ‘나노유통’이 확산했다. - 유통시장 역시 더 작은 단위로 쪼개졌다. 소비자의 취향이 미세화되는 만큼, 이를 빠르게..

Review 2023.08.26

책 / 데이터 분석가의 숫자유감

1. 상관관계와 인과관계 데이터를 보면서 흔히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혼동한다. 상관관계는 두변수가 얼마나 상호 의존적인지를 의미한다. 이를 파악하는 방법은 한 변수가 증가하면 다른 변수가 따라 증가하거나, 감소하되 그 추이를 따르는 식이다. 이를 숫자로 표현하는 것이 상관계수*다.* 여러 데이터를 분석할 때 그 추이가 비슷한지를 확인하는 데 상관계수를 보통 우선적으로 사용한다. 피어슨 상관계수를 가장 많이 사용하고 스피어만 상관계수 등을 사용하기도 한다. 인과관계를 분석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과거의 값이 현재의 값에 영향을 계속 미치는 ‘자기상관성’이라든가, 누락된 변수에 대한 ‘편향성’*이라든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날씨 같은 ‘외생 변수’의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상관관계가 ..

Review 2023.08.23

230823

간밤에 비가 내렸는지 아침 공기가 조금 서늘해졌다. 마음의 열기에도 이런 서늘함이 필요할 때가 있다. 마음에 물을 주고 온도를 낮춰 줄 수 있는 활동이 필요하다. 어제 온 메일 때문에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내 화가 났다. 화가 난 이유를 곰곰이 들여다보니 하나는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에 불필요한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자는 왜 그 일이 불필요한지 설명하는 것으로 대응할 수 있다. 후자는 사실 대응할 필요도 없다. 내가 무시당할만한 실수나 잘못이 있었다면 바로잡으면 되고, 없었다면 무상식적인 태클은 무시하면 된다. 나는 내가 인정하지도 않는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평가되거나 가치 절하될 수 없는 존재이니까. 내 감정과 에너지를 쓸데 없..

Diary 2023.08.23

책 / 모래로 지은 집

-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 내 말에 모래는 고개를 돌렸다. 그 말이 모래를 어떻게 아프게 할지 나는 알았다. 나는 고의로 그 말을 했다. 너처럼 부족함 없이 자란 애가 우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네가 아무리 사려 깊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가 뭘 알아, 네가 뭘. 그건 마음이 구겨져 있는 사람 특유의 과시였다 - “사람은 변할 수 있어. 그걸 믿지 못했다면 심리학을 공부할 생각은 못했을 거야.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한 사람은 변할 수 있어. 남을 변하게 할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자기 자신은.” 1학년 말, 전공 선택을 하면서 공무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이 궁금하고,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알고 싶다면서. 타고난 부분이..

Review 2023.08.19

책 / 지나가는 밤

- 언제나 주희였다. 싸우고 나서 먼저 미안하다고 말했던 사람은. 쪽지로, 핸드폰 문자로, 지나가는 윤희의 팔을 붙잡고 멋쩍게 웃었던 사람은. 지금도 주희는 예전처럼 이 관계를 돌보려 하고 있었다. 하기 힘든 말을 애써서 겨우겨우 이어나가면서. 그런데도 윤희는 그 마음에 어떻게 답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무료하고 긴 하루하루로 이어진 시간, 아무리 노래를..

Review 2023.08.19

책 / 후회가 우리를 더 인간답게 만듭니다

후회에 관한 유의미한 발견은 무엇이었나요? 사람들은 너무도 다양하게 많은 것을 후회하더군요. 연애, 재정, 가족, 교육 등등. 그 심층구조를 들여다보니 후회는 4가지로 정리됐어요. 첫째, 삶의 안정적 인프라를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기반성 후회. 둘째, 성장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대담성 후회. 셋째, 양심적이지 못한 일에 대한 도덕성 후회. 넷째, 더 사랑하고 손 내밀지 못한 관계성 후회입니다. 하지 않은 일을 더 많이 후회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미소 지으며)이미 한 행동에 대한 후회는 선택지가 있어요. 괴롭혔던 사람에게 사과할 수도 있고, 흉한 문신은 지울 수도 있죠. 차선책으로 해석을 달리할 수도 있어요. 가령 “그 사람이랑 결혼한 건 후회하지만 ‘적어도’ 예쁜 두 아이를 얻었잖아”처럼요...

Review 2023.08.19

책 / 선한 사람이 이긴다는 것, 믿으세요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는 컵 하나를 가지고 보디와 마인드와 스피릿을 설명하셨지요. 우주와 나의 거리가 당겨진 흥분감에 저는 며칠 동안 잠을 못 이뤘어요. 하하. 지금까지 유명한 철학자의 말은 다 어려웠어요. 어렵게 얘기해야 그 사람 이름이 오래 남거든. 음식 먹고 체해야 뭘 먹었는지 생각하지. 소화 잘 되면 뭐 먹었는지 기억이나 해요? 그래도 내가 다시 쉽게 말해줄게요. 여기 컵이 있죠? 이게 육체예요. 죽음이 뭔가? 이 컵이 깨지는 거예요. 유리그릇이 깨지고 도자기가 깨지듯 내 몸이 깨지는 거죠. 그러면 담겨 있던 내 욕망도 감정도 쏟아져요. 출세하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고 돈 벌고 싶은 그 마음도 사라져. 안 사라지는 건? 원래 컵 안에 있었던 공간이에요. 비어 있던 컵의 공간. 그게 은하수까지 ..

Review 2023.08.17

책 / 그 여름

- 이경은 서서히 이해하게 됐다. 수이가 자신에 대해 별로 말하지 않았던 건 수이의 그런 성향 때문이라고. 수이는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대해 이경만큼의 생각을 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수이는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이었고, 선택의 순간마다 하나의 선택을 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려고 노력했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결과에 대해서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것이 수이의 방식이었다. 수이는 자동차 정비 일을 하면서 그것이 자기 인생에 어떤 의미로 작용하는지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니까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반면 이경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 끊임없이 생각했고, 어떤 선택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어떤 선택을 하더..

Review 2023.08.17

고요한 사건

헐벗어가는 아카시아나무 뒤에서 무호가 초 대신 폭죽을 꽂은 케이크를 들고 나오자 해지는 뭐하는 짓이냐며 소리를 지르다가 이내 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무호를 좋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닌가. 좋아한 것은 아니었나. 어쩌면 우리 셋의 관계의 축이 한쪽으로 기울어버렸음을 깨닫는 순간 느낀 허전함이 나를 착각하게 만든 것뿐이었을까. 하지만, 아무튼, 그 순간에는, 크림 범벅의 케이크 위로 반짝이는 불꽃과 그 너머 어른거리는 무호의 환한 얼굴을 보면서, 사실은 내가 무호를 얼마간 좋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또 동시에, 그렇더라도, 나와 무호의 삶이 교차할 수 있는 순간은 너무나도 짧고, 우리는 이제 몇 년의 시간이 흐르지 않아 완전히 다른 길을..

Review 2023.08.11

주변인들의 연속적인 결혼에 대처하기

예전의 한국 나이 기준으로 34살, 올해 6월부터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추어 33살이 된 나에게 이제 미혼보다는 기혼인 또래가 더 많다. 코로나 때문에 주춤했던 주변 사람들의 결혼 소식과 청첩장 모임이 다시 이어지고 있는 요즘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결혼을 공표하는 것이 미혼인 사람들에게 '나는 너보다 낫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결혼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는 상징이 된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지 않았다는 건 하자가 있음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결혼이 인생의 어느 부분에서 성공하거나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기준이 된다고 생각했고 그건 아마도 사회적 학습에 의해 만들어진 생각이기에 지금 내가 주변 사람들의 결혼 소식을 들을 때마다 우울해지는 것일테다. 물론 사회적 표준에 맞춰지는..

Diary 2023.07.30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시작은 지금도 자세히는 알지 못하는 회사의 어떤 사정(사내 정치 싸움의 작은 나비효과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듯) 때문에 엉뚱한 부서로 옮기게 되면서부터였다. 인사과에서는 해당 분야에 기초적인 지식조차 없어 걱정하는 나에게 첫 두 달은 복잡한 업무들을 차근차근 익히는 일종의 견습 기간일 테니 부담 갖지 말라고 안심시켰지만, 새 부서 새 직속 팀장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첫 주부터 그는 나를 이 부서에서 돌아가는 모든 일을 대충 다 알고 있어야 마땅한 n년 차 경력자쯤으로 대했다. 이름도 처음 듣는 일을 무턱대고 시켜놓고는 머뭇대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어떻게 아직 이것도 모르냐고 툴툴대며 알려주는 식이었다. 그마저도 완전치 않아서 자주 밤을 새가며 독학으로 일을 터득해야 했고, 그런 결과물은 대개 완전치 못..

Review 2023.07.24

다정소감

- 무엇보다 공포를 버텨내는 힘이 달라졌다. 그라운드 위에서나 그라운드 밖에서나 마찬가지였다. 물리적 충돌을 대면하는 수밖에 없다면 여차하면 나도 육탄 방어할 거야, 때릴 수 있다면 나도 같이 때릴 거야,라는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자 공포가 조금 줄었다. 진짜로 그럴 수 있든 없든(아마도 실제 상황이 닥치면 못 그럴 확률이 높아 보이지만), 그런 그림조차 그려지지 않았을 때는, 백지처럼 새하얘진 머리와 함께 온몸이 얼어붙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당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이 어떤 느낌인지 잘 모른다는 점도 공포의 요인이었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상상할 수 있는 최대 크기의 고통을 떠올리며 더 심하게 얼어붙곤 했다. 그런데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

Review 2023.07.06

유투브 / 뉴스안하니

요새 뉴스안하니라는 유투브 채널을 열심히 보고 있다. MBC 아나운서들의 일상 이야기가 업로드 되는데 같은 직장인으로서 애환과 공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정말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아나운서들이 많은데, 높은 경쟁률을 뚫고 거르고 걸러서 뽑힌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 그런가 보다. 아니면 특히 더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아나운서들이 관계가 좋고 섭외가 쉬워서 자주 노출 되는 걸지도. 나도 이런 사람들과 같이 일하면 좋겠다(하지만 극 내향형이라 같이 못 놀듯) 혹은 내가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회사생활 판타지를 보는 느낌으로 애청하고 있다. 내가 특히 좋아하는 아나운서는 박소영 아나운서인데 신입사원인데도 늘 밝고 귀엽고 주눅들지 않는다. 사람이 맑고 악의가 없다는 것이 말하는 것과 표정에서 전해진다...

Review 2023.06.23

책 /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법

- 자존감은 불안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뭔가 조그만 일이라도 하면서, 작은 변화를 경험하면서 자존감이 높아지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낮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생각을 더 깊게 해보기를 꺼려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심으로 자기를 돌아보는 것보다 힘든 부분을 심리학 용어로 포장하는 것이 더 쉬우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누구에게나 쓰일 수 있는 용어를 통해 진짜 나를 돌아보는 것을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특별한 해결책이 없는 근사한 심리 용어에 도망치는 것보다는, 불안한 상태에서 작은 변화라도 만들 수 있을 때, 그 결과로 자존감이 높아질 수 있습니다. - 우리는 남이 저런 일을 겪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도 막상 스스로에게는 더 관대하지 못합니다. ‘객관적으로’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스스로에게..

Review 2023.06.22

살고 싶다는 농담

-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결론이 아니라 결심이다. 이 말을 소리 내어 중얼거리기 시작한 게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결론에 사로잡혀 있으면 정말 중요한 것들이 사소해진다. 결론에 매달려 있으면 속과 결이 복잡한 현실을 억지로 단순하게 조작해서 자기 결론에 끼워 맞추게 된다. 세상은 원래 이러저러하다는 거창한 결론에 심취하면 전혀 그와 관계없는 상황들을 마음대로 조각내어 이러저러한 결론에 오려 붙인 뒤, 보아라 세상은 이렇게 이러저러하다는 선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정작 소중한 것들을 하찮게 보게 만든다. 이와 같은 생각은 삶을 망친다. 거창한 결론이 삶을 망친다면 사소한 결심들은 동기가 된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결심들을 잘 지켜내어 성과가 쌓이면 삶을 꾸려나가는 중요한 아이디어가 될 수도..

Review 2023.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