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책 / 자기만의 공간

유연하고단단하게 2024. 9. 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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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의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린 뒤로 나는 매일 밤 나를 위해 집 안을 정돈하는 시간을 가진다. 호텔의 턴다운 서비스처럼, 잠깐씩이라도 간단하고 사소한 서비스를 나에게 베푸는 것이다. 이 과정은 집에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시작된다. 무심결에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영수증을 치우는 것. 의자 등받이가 짊어지고 있는 하루치 옷더미를 정리하는 것. 침대 위엔 두어 번 팡팡 두드린 베개와 반듯하게 펼친 이불만 남겨 둔다.

턴다운에는 북북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청소기질, 구석구석 힘주어 문지르고 물을 튀기는 설거지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세탁기 탈수가 끝나기까지 쏟아지는 졸음과 다툴 필요도 없다. 휴식을 해치지 않는, 빠르고 간단한 정돈이면 충분하다. 조용하고 힘들지 않은 과정이다. 낮의 시간을 돌이키기엔 하루는 조금 남았고, 나를 챙기는 나도 너무 무리해서는 안 되니까. 그런 조용한 위로와 배려의 시간을 거치는 것만으로도, 불빛을 낮춘 방 안에는 소란하지 않은 아늑한 격려가 깃든다.

긴장의 연속인 실낱같은 하루하루. 짧은 턴다운은 그 속에서 놓치기 쉬운 섬세한 보살핌을 자신에게 베푸는 일이다. 세상 어디에도 내 편이 없는 것만 같은 날은 또 찾아온다. 겨우 익숙해지는 것 같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시 낯설어지는 그런 날, 나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일단 집으로 돌아간다. 구겨져 있던 이불을 포근포근 다시 펼치며 “오늘도 애썼어, 이제 푹 자” 하고 토닥여 줄 나를 만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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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와 취기가 겹쳐 좀 휘청휘청해도 먹은 자리를 치우고 설거지와 양치질을 하고 잔다. 하룻밤 미뤄 봤자 어차피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난 내가 할 일이다. 하지만 내일의 나는 그냥 이대로 잠들고 싶은 오늘의 즐거움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 먹은 사람이 치운다는 동거의 기본 규칙은 나 혼자 사는 생활에도 적용된다. 여덟 평 남짓한 작은 방에서 나는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를 데리고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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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의 집세까지 내 주지 말라.”

  이 문장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언니와 같이 사느라 반씩 부담을 해도, 월급의 4분의 1 정도가 집세와 관리비 등으로 나갔다. 그저 서울의 한 곳에서 숨만 쉬는데도 내가 버는 돈의 반의반이 쓰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 집은 방에도 거실에도 사람 한 명이 대자로 누울 만한 공간이 없었다. 이 집에서 내가 짐보다 열세에 몰려 있다는 것은 헤아릴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집 안 가득 흘러넘쳐 있는 물건들은 눈을 감아도 무의식까지 따라와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러니 아무리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았다. 책을 한 권 읽고 싶어도, 잠깐 업무를 다듬을 일이 생겨도 일단 카페로 향했다. 집에서는 집중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할 일 자체에다 외출할 준비까지 덤으로 붙고 나면 모든 게 귀찮아져서 결국 미루기 일쑤였다. 쌓인 일이 있으니 집안일에도 마음이 가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최대의 물건 속에서 내 일상의 가능성은 점점 최소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한 해의 마지막 밤, 나는 스스로 만든 수납 정글에서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새해가 밝음과 동시에 내 인생 최대의 정리도 시작됐다. 테트리스 같은 정돈이 아니라, 정리.

처음 2주는 무지막지한 짐 상자를 정리했고, 그다음 일주일은 다시 옷과 책, 주방용품, 가구 순서로 살림살이를 줄여 나갔다. 나눔, 기증, 판매, 폐기.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정리했다. 매일 쓰레기를 들고 나르느라 손목이 시큰거렸지만 그래도 탈정글의 결과는 훌륭했다. 2.5톤 트럭으로 실어 온 살림이, 이듬해 독립하면서는 1톤 트럭이 헐렁할 만큼 줄었다.

악착같이 물건들을 정리하고 집 안이 좀 여유로워진 후, 나는 집에서 하는 일들을 조금 더 좋아하게 됐다. 집안일을 하든 텔레비전을 보든, 그 순간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다. 마치 깨끗하게 치운 책상에서 공부를 시작하는 것처럼 이젠 더 샐 데가 없이 집중만 하면 되는 기분이었다. 전에는 그런 온전한 몰입의 순간을 느끼고 싶어서 여행에 집착하기도 했는데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 감각을 바로 내 집 안으로 옮겨 올 수 있다는 것은 아주 놀랍고도 흡족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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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보는 기준도 까다로워졌다. 방위, 층높이, 채광, 통풍 같은 기본 사항들부터 보일러 연식 같은 자세한 조건들까지 목록을 만들어 꼼꼼하게 체크한다. 남향집이라고 다 같은 남향받이가 아니다. 정남향, 남동향, 남서향이 있고 해가 드는 정도가 전혀 다르다. 심지어 실제로 집을 보러 가서 나침반을 켜 보면 들은 것과 전혀 다른 방위인 경우도 많았다. 그 외에도 살필 것은 많다. 수압과 배수는 정상인가. 건물 외벽 쪽에 결로 흔적은 없는가. 거실 곳곳에 바퀴벌레 약이 붙어 있지는 않은가.

  품질 검사원처럼 목록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집을 보면 공인중개사나 집주인들은 싫은 기색을 보인다. “아유, 원룸이고 투룸이고 안 이런 데 없어요” 혹은 “그런 건 자기 집 살 때 따지는 거지, 뭐 잠깐 살 집에 그렇게까지…” 하는 핀잔 섞인 말들. 그러나 이제 더는 그런 말들에 움츠러들지 않는다. 빨리빨리 거래를 성사시키고 싶은 그들의 입장도 있겠지만, 앞으로 그 집에서 사는 것은 나이기 때문이다. 당장 부자가 될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열심히 들여다보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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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살아온 습관을 바꾸려면 딱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만큼 노력해야 한다. 너희는 이제 열일곱 살이니까 지금부터 노력하면 서른다섯 살쯤엔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 수 있겠지.”

  그때의 우리에게 서른다섯 살이란 다음 생과 마찬가지로 아득히 먼 이야기였다. 키들키들 웃는 우리에게 선생님은 농담처럼 덧붙이셨다.

  “하지만 나는 쉰이 넘었으니까, 뭘 바꾸려면 이미 백 살이 넘어가 버린단 말야.”

  나는 그 이야기가 왠지 의심스러워 선생님께 질문했다. 그러면 선생님은 지금 바꾸고 싶은 습관이 아무것도 없으시냐고. 선생님은 잠시 생각하다 대답하셨다.

  “없다. 다만 내가 원하지 않은 게 습관이 되지 않도록 노력을 하지.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열입곱 살 때보다, 오히려 정말로 서른다섯 살이 된 지금 내 삶엔 아직 더 변화할 시간이 많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서도 사라질 줄 모르는 욕심을 미워하는 대신, 나는 선생님의 의지를 떠올린다. 살아온 시간만큼 지치지 말고 노력해 보자고. 선생님의 말씀이 정말이라면 나도 환갑이 되기 전에는 조금 더 겸허한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일흔을 목표로 새로 뭔가를 시작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다시 깜빡이를 켠다. 천천히 모퉁이를 돈다.



- <자기만의 공간>, 유주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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