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은희경, 새의 선물

유연하고단단하게 2008. 12. 26. 11:38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남의 시선을 싫어하게 된 것은.
한동안은 누가 나를 쳐다보고 수군거리기만 해도 엄마 이야기라고 지레 짐작했으며
남에게 그것을 눈치채이기 싫어서 짐짓 고개를 숙여버리곤 했다.
그러나 바로 그렇게 남에게 관찰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나는 누구보다 일찍 나를 숨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누가 나를 쳐다보면 나는 먼저 나를 두 개의 나로 분리시킨다.
하나의 나는 내 안에 그대로 있고
진짜 나에게서 갈라져나간 다른 나로 하여금 내 몸 밖으로 나가 내 역할을 하게 한다.
내 몸 밖을 나간 다른 나는 남들 앞에 노출되어 마치 나인듯 행동하고 있지만
진짜 나는 몸 속에 남아서 몸 밖으로 나간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나의 나로 하여금 그들이 보고자 하는 나로 행동하게 하고 나머지 하나의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남에게 '보여지는 나'와 나 자신이 '바라보는 나'로 분리된다.

물론 그 중에서 진짜 나는 '보여지는 나'가 아니라 '바라보는 나'이다.
남의 시선으로부터 강요를 당하고 수모를 받는 것은 '보여지는 나'이므로
'바라보는' 진짜 나는 상처를 덜 받는다.
이렇게 나를 두 개로 분리시킴으로써
나는 사람들의 눈에 노출되지 않고 나 자신으로 그대로 지켜지는 것이다.


- 은희경, '새의 선물' 중에서 

 

 

 

 

 

상처받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와 '진짜 나'로 마주서서 소통할 수 없다는 건 참 슬픈 일이다.
서투르게 나를 숨기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온통 낱낱이 드러내 보이고 마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항상 쉽게 상처받기는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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