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지수 = a · (충족시킨 욕구의 양 / 충족시키려는 욕구의 양) ; a는 양(+)의 상수
이 방정식이 말하려는 것은 아주 단순하다. 돼지가 얼마나 행복한지는 자기가 충족시키고자 하는 욕구 가운데 얼마만큼을 실제로 충족시키느냐에 좌우된다는 것이다. 돼지가 더 행복해지려면 이 '행복 방정식'의 좌변이 커져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돼지는 우변의 분자를 키웠다. 먹이, 화장실, 침대, 룸살롱, 세계일주는 다 그 수단이었다. 하지만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정력과 시간의 낭비에 불과하다. 그는 조금도 더 행복해질 수가 없다. 그 이유를 아는 데는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의 수학만으로 충분하다. 자원의 양은 유한하기 때문에 그걸로 충족할 수 있는 욕구의 양 역시 유한하다. 방정식 우변의 분자는 유한한 크기라는 말이다. 그런데 충족시키고 싶은 욕구는 무한하다. 분모는 무한대라는 이야기다. 유한한 것을 무한한 것으로 나누면 뭐가 되나? 답은 0이다. 이건 '수학적 진리'다. 돼지가 새로운 그 무엇을 소유하고 소비할 때마다 느낀 행복은 심리적 착각에 불과하다. 수학적으로 볼 때 '무한한 욕망'을 가진 돼지의 행복지수는 언제나 0이다. 그가 재배하고 처분하고 소비하는 '자원의 양'은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 어떤 경제학자가 아무리 절묘한 '선택'의 이론을 제시한다 할지라도 이 수학적 진리를 폐지하지는 못한다. 앞서 인용한 정의(定義)를 고수하는 한, 경제학은 사람을 조금도 더 행복하게 해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