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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빠져나가려던 그는 반대편 출구를 통해 아침 8시 38분에 출근 열차를 타는 플랫폼으로 내려왔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2번 차량 3번 칸 앞에 섰다. 6시 58분이었다. 그러니까 꼭 열 시간 이십 분 만에 아침에 떠났던 곳으로 돌아온 셈이었다.
열 시간 이십 분. 그는 그 시간을 잊지 않으려는 듯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그 동안 무얼 했나. 서둘러 복사실 문을 열었고 몇 권의 책을 제본했고 제본해놓은 책을 팔았고 책과 자료의 일부를 복사해줬고 자꾸 종이가 걸리는 복사기를 손봤고 정오가 되어 정식 A세트를 먹었다. 그 후에는 틈틈이 영화를 봤고, 영화를 보다 졸았고, 몇 페이지인가 복사를 했고, 종이가 걸리는 복사기를 손봤고, 제본해 놓은 책을 팔았고, 몇 편의 책을 추가로 제본했다. 구내식당의 점심 세트를 기준으로 그의 하루는 데칼코마니처럼 오전과 오후가 동일하게 반복되었다. 오전과 오후뿐만이 아니었다. 자정을 기준으로 하면 어제와 오늘이, 주말을 기준으로 하면 지난주와 이번주가, 연말을 기준으로 하면 작년과 올해가 같았다. 그러므로 모든 미래는 과거와 동일한 시간일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같듯이 미래는 현재와 같을 것이다. 언제나 같다는 것, 그 때문에 그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으나 이내 언제나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한숨을 거둬들였다.
편혜영, '동일한 점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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