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성대역 인근 전셋집이 눈에 들어왔다. 가격이 얼추 맞았고, 위치도 좋았다. 물론 반지하였지만. 언니 말대로 5천만 원으론 지상의 집을 구할 수 없었다. 곁에서 함께 부동산 사이트를 들여다보고 있던 엄마는 바닥에 누워버렸다. 이제 빨래를 어떻게 말린다니. 엄마는 빨래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고작 빨래 문제만 걱정하는 게 이상하게도 안심이 됐다.
빨래방 가서 건조기로 말리면 되니까 걱정 마. 어딜 가든 살아. 다 마찬가지야. 나는 수영 언니나 할 법한 말을 엄마에게 해주었다.
-
중증 우울증 판정을 받았을 때 엄마에게 노트북을 가져다주며 뭐든 써보라고 했다. 일기를 쓰면서 마음을 다독이는 습관이 있었기에 엄마도 그렇게 해보길 바라서였다. 그러나 엄마는 긴 글은 쓰기 싫어했고, 단상 같은 것을 기록하기 시작하다가 나중엔 시를 썼다. 그게 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라고 엄마는 말했다.
정말 너밖에 없을 거다. 너는 이게 시로 보이니?
응, 아무리 봐도 시로 보여.
그때부터 엄마는 거의 매일 한 편씩 시를 썼다.
-
마스크를 꼭 써야 하는 세상이 된 뒤로 엄마는 동네를 벗어난 적이 없었다. 마을버스 종점까지였던 엄마의 생활 반경은 이제 집 근처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종점에 가본 것도 용기를 내서 한 일이었다. 아무런 목적 없이 종점에서 내려 조금 걷다가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지만, 엄마는 바다를 보러가는 것처럼 들뜬 마음이었다고 했다. 종점이 바다 같았어. 나는 엄마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걸 시로 써보라고 대꾸했다.
-
이게 무슨 냄새지? 엄마는 남자의 말은 듣지도 않더니 갑자기 감자조림 냄새가 난다고 말했다. 그 말을 기쁜 듯이 해서 나뿐만 아니라 남자도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엄마의 말대로 감자조림 냄새가 나긴 했다. 처음엔 미미했지만 점차 진해졌다. 확실히 감자조림 냄새였다. 때마침 옆방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환기 장치를 타고 음식 냄새가 고스란히 넘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밖으로 먼저 나갔다. 냄새의 침입이 공간의 섞임으로 연결되는 상황이 더럽고 치사한 종류의 범죄처럼 느껴졌다.
침해하지 말라고. 이게 어렵나?
각자 그 자리에서, 독립적으로. 이게 어렵나?
머리 차일 일 없이. 네가 먹는 반찬 내가 알 일도 없이. 이게 어렵나?
고작 한 군데를 보았을 뿐인데 피로감이 엄습했다.
-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지친 듯 눈을 내리깔았고 나는 그제야 엄마의 속눈썹에 맺힌 감정을 보았다. 우리는 가난해도 너무 가난했다. 하지만 둘 다 그걸 인정할 수 없었는데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우리가 함께 살 집을 구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5천만 원은 아버지가 평생 동안 모은 재산이었다. 우리는 그걸 너무나 잘 알았기에 절대로 기죽지 않겠다고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울의 집값은 아버지의 유산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느새 아버지는 6평 남짓한 반지하방의 전세금만 남겨준 사람이 되어 있었다.
-
안 그래도 짐이 많은데, 원룸에 이 짐을 다 넣을 수는 없을 텐데 고구마 줄기는 지나치게 잘 자라 천장에 닿을 듯했다. 쑥쑥 자라며 내게 자기 방을 달라고 외치는 듯했다. 나는 옆방의 고구마 줄기가 미웠다. 있는 줄도 몰랐던 조용한 식물까지 미워하는 나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작아진 걸까. 6평짜리 반지하방만큼?
이불을 덮고 누웠다가 벌떡 일어나 불을 켜고 일기장을 꺼내왔다. 어떤 말이든 써야지. 이게 시인지 일기인지 잡념의 배설인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단어들을 꺼내놓지 않으면 영원히 속에 박혀버릴 것 같았다. 그게 내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일기장을 펼치자, 볼펜을 쥐고 있는 손은 도무지 움직이려 들지 않았고 단어들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우리가 우리의 집을 찾지 못하는 것처럼.
심호흡을 하고 단어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구마 줄기.
써놓고 보니, 무해한 단어였다. 차분하게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종이에 앉는 단어도 이렇듯 제자리가 있는데 우리는 왜 아무 곳에도 앉지 못할까. 어쩌면 엄마는 민들레 꽃씨처럼 날아다니다 어딘가 안착할 거라고, 반세기 넘게 살아오면서 늘 그랬듯 지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고서야 5천만 원이 큰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나 역시 그게 아주 큰돈이라고 생각했었다. 7년 전, 아버지가 그것을 우리에게 남겼을 땐.
하지만 엄마, 우리는 민들레 꽃씨가 아니고 우리에겐 집이 필요해.
-
한자 간판이 걸려 있는 인력사무소 거리를 하염없이 걷다가 계단 난간에 붙어 있는 구인 공고를 발견했다. 그 옆으로 수십 장의 구인 공고가 나붙어 있었다. 양돈장 남 구함, 월급 180~200만, 비자무, 불법됩니다, 연락주세요. 배추작업, 남녀 부부 구함, 일당 10만 원, 전라도 해남, 비자 C-38, C-39. 모텔 남녀 부부 환영. 고물상 남녀 부부 환영. 굴 까기 작업 공장, 연령 제한 없음, 1개월 후 300만 원 인상됩니다. 꽃게 배 타실 5명 구함, 건강한 남자, 비자 F-4.
-
머리가 아팠다. 터질 듯이 아파서 횡단보도를 다 건너면 나오는 타코야키 트럭 앞에 멈추어 섰다. 타코야키를 굽고 있던 아저씨가 무심히 나를 쳐다보았다. 타코야키를 사려는 건가. 아저씨의 눈빛에 떠오르는 질문이 훤히 보였다. 나는 일부러 타코야키 트럭 옆 호두과자 리어카로 걸어가서 호두과자를 샀다. 그렇게 엉뚱한 사람을 실망시켰다.
-
이서수, <미조의 시대> 중에서.
-
계약직을 전전하며 엄마와 지낼 반지하 집을 구하러 다니는 '나'. 끔찍한 성인 웹툰의 어시스턴트로 일하며 돈을 버는 '수영 언니'. 상태가 안 좋은 노트북으로 매일 시를 쓰는 '엄마'. 이들의 담담하고 꿋꿋하고 밝고 강한 모습에 매료되었다. 주위 환경과 처한 상황과 시대의 양면성에 치이고 희생되어 지칠지언정 인격을 놓아버리지 않는 고결한 인물들. 읽으며 어쩐지 되려 위로를 받는다. 위로를 건네고 싶다. 소설 속 인물들에게. 어느 날의 나에게도.
( 추천지수 : ★★★★★ )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 / 진주의 결말 (0) | 2023.11.30 |
---|---|
책 / 연희동의 밤 (0) | 2023.11.19 |
넷플릭스 / 서부전선이상없다 (1) | 2023.11.13 |
책 / 읽는 생활 (0) | 2023.10.26 |
책 / 기억의 뇌과학 (1) | 2023.10.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