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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똥폼' 커리어 플랜 집어치워

유연하고단단하게 2010. 7. 1. 00:07


‘똥폼’ 커리어 플랜 집어치워
[매거진 esc] 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저는 작년 여름에 모 대학을 졸업하여 현재 26살 백수입니다. 지난해 한 신문사에서 인턴을 한 경험이 있어 지금까지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딩 때부터 시민단체 활동에 관심이 많았지만 진로로 삼긴 좀 그렇고, 그렇다고 기업이나 회사에 취직해 봉급생활자로 살기는 싫습니다. 일반 회사에 들어가기에는 생겨먹은 성품부터 달라먹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타협한 것이, 방송사 라디오 피디나 기자이지요. 그런데 막상 준비해보니 만만치 않네요. 진작에 공부해온 학벌 좋고 스펙 좋은 애들 많고, 그걸 따라갈 수 있을까 싶고. 한편,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음악을 하고 싶어했어요. 지금이라도 홍대 바닥을 뒤져 뭔가를 해보고 싶은데 이 바닥도 모르겠고, 한번은 기획사 시험을 보러 가서 계약하자는 말도 들었지만 결국 행사 뛰겠구나 싶어 그런 건 또 못해먹어서 포기했습니다. 어쨌든 지금은 5:5로 기자/피디를 바라보고 있어요. 막막하긴 하지만 저는 그 외에 타협할 수 있는 다른 길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학벌 올릴 겸 유명대학 작곡과 편입이나 아예 인도나 남아공을 떠돌며 새 인생 개척하는 것도 어떨지 모르겠네요. 참고로 제 스타일이 치기로 삭발도 해보고 빚내서 지구 일주도 할 만큼 자유분방했거든요.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부모님에게 인정받는 딸, 즉 사회적 성공도 바라는 저는, 아직 헤매고 있는 걸까요?


A 백수는 사실 무작정 스펙 안 되는 사람들을 말하는 건 아니지요. 그보다는 내가 바라는 것과 사회에서 내게 제공할 수 있는 것에 ‘갭’이 있어서 안타까운 사람들이지요. 그래서 사실 ‘눈 낮춰서 들어갔다’라는 말은 좀 어폐가 있어요. 거래가 성사되었다면 그것이 제대로 된 눈높이였던 셈이니까요. 그때쯤 되어서야 세상에 유포된 ‘간절히 원하면 된다’가 뻥이라는 걸 깨닫게 되겠지요. 진실은 ‘능력 있고 노력하는 사람이’ 간절히 원하면 된다는 것이고, 능력과 노력이 비범치 않은 사람들에겐 이 세상엔 안 되는 것들이 훨씬 많다는 것인데.

이대로 가다간 향후 몇 년 계속 백수 해야겠네요. 자유로운 영혼이고 싶지만 주변 사람들 배려해서 타협점 찾았다던 피디/기자 입사는 현실적으로 녹록지 않고(티오 자체도 별로 없거니와, 나이나 출신교의 약점을 커버할 만한 다른 특장점이 있던가요?) 그렇다고 회사원은 죽어도 못 하겠다는 거 아닙니까. 게다가 백수 평균연령도 자꾸만 높아져서 26살 정도면, 아직 유예기간 몇 년 보장된 듯한 착각도 든다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일반' 회사에 들어가기엔 본인이 그토록 '특별'하고 '유별'난가요? 약골인 저는 자주 동네 약국을 찾는데요, 가보면 제약회사 영업사원들을 많이 보게 됩디다. 신입티 풀풀 나게 양복 입은 꼬라지도 어색하고 약사 아주머니들에게 세일즈하는 어필법도 엉성하기 짝이 없죠. 이런 게 일반 회사원의 모습이라면 ‘에휴 멀쩡하게 학교 나와서 저게 뭐냐’ 싶겠죠? 하지만 이 볼품없어 보이는 고생들이 실은 그 사람의 기초 업무능력을 단단히 단련시켜주는 것들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해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해내는 사람들이야말로 훗날 그 어떤 일을 일으키더라도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그 기초 업무능력을 갖춘 사람들이지요.

헌데 어쩌다가 일반회사 직장인이 바보 취급을 받게 된 걸까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할 타입이 못 돼서.” “난 성질이 더러워서 조직생활엔 안 맞아.” “무조건 좋아하는 일을 해야죠.” 이렇게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마치 프리랜서가 성공한 한참 후에 인터뷰에서 쿨하게 내뱉는 멘트 같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꿈과 야심으로 밀고나가려고 하는데, 자신의 비밀 병기가 어쩜 ‘남다른 개성’이라면, 걱정이 됩니다. 왜냐면 ‘개성’이라는 건요, 기초적인 업무능력 위에서 비로소 꽃필 수 있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웬 회사원 옹호냐고요? 원했던 피디/기자가 못 되면 당신에게 현실적으로 남는 건, 그토록 피해 다니려 했던 봉급쟁이 생활밖엔 없기 때문입니다. 아휴, 내가 우습게 봤던 회사들이 도리어 내가 그들에게 필요 없는 인간이라며 입사시험에서 떨어뜨리지만 않으면 다행입니다.

우리나라에 ‘준비중’ 인생, 너무 과하게 많습니다. 첫 단추 잘 끼우면 좋겠지만 되도 않는 로또식 '한방 승부'를 원하는 이들도 은근히 많습니다. 특수한 사람들을 보고, 나도 특수하게 살아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더더욱 위험한 발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인간은 그럴 능력이 못 되고 그런 노력도 안 하기 때문입니다. 첫 단추 잘 못 끼워도 어차피 될 놈들은 어떻게든 더 많은 깨우침을 쌓아 자기 그릇대로 쭉쭉 뻗어가니 걱정 없습니다. 일단 어떻게든 ‘준비중’ 팻말을 내리지 않는 한 아무것도 시작이 안 됩니다. ‘준비생’은 냉정히 말해 인생을 살고 있는 게 아니죠. 그러니 일단 인생부터 시작시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요, 막상 이 정도 후진 회사에서나 받아주는 자신의 적나라한 레벨이 객관적으로 드러나는 게 두려운가요?

   
 
부디 당신이 내 말에 기분이 확 나빠졌으면 좋겠습니다. 난 ‘대다수의 인간’ 중 한 명이 아냐!라며 울컥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세게 압박하며 ‘지금 이럴 때가 아니지’라고 초조해했으면 좋겠습니다. 자존심 상하고 속상해 미칠 것 같은 그 부정적 굴욕마저도 에너지로 바꿔낼 수 있어야 그 일을 조금이라도 간절히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아니면 이건 순전히 똥폼 커리어 플랜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