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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돈 벌면서 자아실현 허상인가요

유연하고단단하게 2010. 6. 30. 23:43


돈 벌면서 자아실현 허상인가요
[매거진 esc]임경선의 이기적인 상담실

 

Q 저의 고민은 왜 인간은 고통 받으면서 일해야 하느냐예요. 올해 27살, 직장 경력 2년차인 전 행정학 전공대로 공무원 시험을 보는 대신 평소 수업을 듣고 매력을 느꼈던 ‘리서치’ 직종을 선택했어요. 적은 보수에 업무 과다 업계지만 좋아하는 일인데 그게 뭐 대수야 싶어 노력해서 조사회사에 입사했죠. 그런데 취업의 기쁨도 잠시,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이건 아닌 거 같아요. 업무 자체도 그렇고, 직장내 분위기도 그렇고요. 직장인이라는 게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고, 옷도 마음대로 못 입고, 팀장 눈치에, 클라이언트 눈치에, 동료들 눈치에, 인간관계도 서로 견제만 하는 분위기예요. 매일 기계적으로 타자와 클릭을 무한 반복하는 저를 보면 한심합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는데, 왜 공무원을 안 한다 했을까,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하는 일 별반 특출난 일도 없어요, 그냥 지시 받는 대로 움직일 뿐 별게 없어요. 직업을 갖는다는 게 곧 자아실현이라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자본주의와 학교교육, 그리고 대중문화의 허상 같아요. 다 먹고살기 위해 하는 거지 뭐 딴게 있나 싶네요. 주위를 봐도 다들 회사 다니기 괴로워하는 것 같아요. 도대체 인간은 왜 즐겁게 일을 할 수가 없을까요? 소수의 예술가를 제외하고 보통 직장인 중에 행복하게 회사 다니는 사람이 있나 의심스럽네요. 제가 좋아하고 흥미를 느꼈던 분야였는데 괴롭네요.


A 모든 회사원들이 고통 받으면서 일한다고 싸잡아서 얘기하는 건 당신이 그런 필터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니 왜 ‘당신이’ 즐겁게 일을 못 하고 있는지만 말씀드리지요.

먹고살기 위해 매일매일 전쟁터로 출근하기, 타협 아니라 프로정신입니다.

첫째, 일을 통해 자아실현이 안 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데 자아실현, 그거 꼭 지금부터 해 먹어야 하나요?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 그리도 후져 보이나요? 전 원고청탁 받을 때마다 알량한 원고료에 매우 연연하는데요, 이런 말 종종 듣습니다. ‘글 쓰는 건 자아실현도 되고 본인도 쓰면서 즐겁잖아요.’ 한마디로 다른 가치로 배부를 네가 돈에 왜 민감하게 구냐, 이해 안 된다는 투인데요, 저야말로 이해 안 되는 건, 물리적으로 먹고살기 위해 일한다는 것, 그게 노동의 가장 현실적이고 숭고한 근본 아니던가요? ‘난 너무 유능하고 멋져’로 마음이 든든한 것보다 나와 가족의 배를 든든히 채워 주는 것, 그런 매일매일의 현실적인 생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버는 것이야말로 프로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말하자면, ‘직업을 가지면 자아실현을 할 수 있다’가 허상이 아니라 좀더 정확히는 ‘직업을 가지면 자아실현을 해야 된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가 허상이란 말이지요. 특히 천직이라며 호들갑 떠는 성공한 사람들의 자아실현 무용담에 곧잘 사람들은 ‘내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라며 마음이 흔들리고 현혹되기 마련이지만 매스미디어를 통해 본 직업의 세계는 늘 보람 있고 희열에 차 있어 보이지요. 이러니 상대적으로 현실의 주변인들은 찌질하고 불행해 보일 수밖에.

둘째, 일이 고통스럽도록 내버려 두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 그 자체로 재미있고 즐거운 일이라는 건 없다고 봅니다. 다만 내 힘으로 원래는 생명력이 없는, 재미없던 일 속에서 어떻게든 재밋거리를 찾거나 만들어 갈 뿐이지요. 그리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없다면 아마 어떤 일을 해도 잘 안될 겁니다.

가뜩이나 현재 2년차라면 더는 막내 특혜도 못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부림당하기 시작하는 고통스러운 연차. 당신이 지루한 데이터베이스만 만지면서 밑작업하는 동안 조사 업무가 가진 고유의 즐거움, 가령 폼 나는 보고서 쓰기 등은 명백히 윗사람들 차지가 되지요. 오랜 기간에 걸쳐 내가 원하는 일을 찾아, 그걸 위해 다른 속세적인 기회마저 포기했는데 왜 보답으로 돌아오는 건 이런 지루하고 가치 없는 업무일까라고 한탄해 보지만, 시킨 대로만 하기 때문에 ‘별일’도 없고 재미도 없는 거겠지요. 단순업무는 말처럼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걸 유능한 이들은 몸소 항의적으로 보여 주지요. 천박한 회사 사람들과 악덕 클라이언트가 싫다고요? 자신과 안 맞는 사람들과 어떻게든 관계를 맺어 가는 것이 월급의 대가인데 그런 측면에선 주니어 시절에 그 스킬 익히는 게 차라리 도와주는 겁니다. 운 좋은 소수의 예술가들요? 돈 못 벌면서 망상과 자학을 오갔을 그들의 2년차 시절은 상상만 해도 안쓰럽습니다.
  
 
‘삽질’로 흔히 경시되는 ‘노력’이라는 거, 이거 나쁜 거 아닙니다. 특히 최소 5년차까지는 정신없이 뭔가를 이 악물고 해 보는 경험을 하면 근시안적인 ‘어떤 보상이 생겨’라기보단 인간으로서의 기본기가 다져져 우린 ‘터프’해질 수 있으니깐요. 사실 2년차 직원에게 자아실현의 기회를 팍팍 안겨 주는 회사가 오히려 수상쩍은 것 아닐까요?

벚꽃이 만개하는 이 계절에 춘곤증으로 더욱 지쳐 갈 우리 샐러리맨과 우먼들. 여느 때처럼 아침 출근길 만원 지하철 속에서 흔들리며 가다가 마치 벼락 계시를 받은 듯, 내려야 할 역을 지나쳐 그날 하루 회사 ‘제끼고’ 훌쩍 나 홀로 여행을 떠나는 유혹을 받기 쉽겠지만, 이거 별로 안 멋있구요, 이거 그냥 땡땡이구요, 출근길이 괴로워도 이 악물고 말도 안 되는 주간회의가 고통스러워도 시부렁대면서 회사 역 앞에서 질끈 내리는 그 뒷모습, 이건 세상과의 비굴한 타협이 아니라 선한 성실함입니다. 진짜 고통은요 언제부턴가 이 나라 젊은이들에게 ‘공무원 시험’이 디비디 바비디 부가 되어 버린 현실이란 말입니다. 이건 허상을 넘어 집단주술이야 주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