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분해

유연하고단단하게 2009. 10. 14. 20:29


 

고 3때 이후로 생리가 끊겼으니 나는 3년동안 생리를 안한 셈이다.
하지만 몸에 별다른 이상도 없는 것 같고, 오히려 생리를 안하면 편하고 좋아서 병원에 가야한다는 필요성을 딱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기보다도, 그냥 심각한 문제로 여기지를 못했다.

그러다 지난 주에 시간이 비는 날이 생겨서 학교 보건소에 검진을 받으러 갔었다.
역시 자궁에는 이상이 없었고, 오늘 나온 혈액검사에서도 별다른 이상이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호르몬 주기를 강제적으로 맞추는게 좋을 것 같다고 해서 야스민이라는 구강피임약을 처방받았다.

학교 보건소에서는 이 약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처방전을 가지고 학교 입구역 근처 약국으로 갔다.
그런데 여기에서 열받는 일이 생겼다. 약사한테 처방전을 내밀었더니 일단 이아저씨 표정이 구려지는 게 보였다. 약을 받으면서 복용 방법을 물어봤더니 그 안에 설명서를 읽으면 된다고 설명도 일축해 버렸다. 별다른 주의 사항은 없는지 물었더니, 네 그냥 일반 피.임.약.이니까요, 하고 딱 잘라서 대답해 버리는 것이었다.

분명히 그것은, 단순히 무뚝뚝하고 불친절한 태도가 아니라,
대낮에 부끄러움도 없이 태연하게 피임약을 사는 여대생에게 다른 손님들로부터 수치심을 좀 받아보라는, 나에 대한 아니꼬운 비하를 담은 행동이었다.

물론 나는 피임 목적으로 피임약을 산 것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인 여성은 누구나 당당하게 자신의 성생활을 누릴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당연하게 인정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만일 나이가 적당히 있어 보이고 착실한 듯한 타입에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이 있을 법한 인상의 남자 손님으로부터 피임약을 달라는 말을 들었더라면, 과연 그런 태도로 약을 팔 수 있었을까?
왜 한국 사회에서는 성적인 것에 대해서 남자가 여자보다 당당할 수 있는 것이고, 여자는 섹스의 권리에 대해서 조금은 부끄러운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미덕'인 마냥 통용되는 것인지. 그건 너무 부당한 일이다.

약을 사고 오면서 점점 화가 나길래 다시 돌아가서 한마디 해줄까 하다가, 그런 인간 때문에 내 에너지를 쓸데없이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화를 삼키고 돌아왔다. 지금도 생각하면 엄청 분하다. 내가 왜 그런 대접을 받고 아무 말 없이 약국을 나왔던 것인지. 나에겐 거기서 아무런 수치심도, 언짢음도 느껴야 할 이유가 없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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