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팔월 초순의 오후

유연하고단단하게 2009. 8. 7. 20:19


휴식이 너무너무 필요한 요즘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곧 퓨즈가 툭 끊어져버릴 것 같은,
내 자신을 풀로 가동시킨 기계처럼 달구었던 나날들.

영화를 보고싶어서 동네에 있는 시네마에 갔는데 딱히 끌리는 것이 없었다.
업이라는 픽사 애니메이션 영화가 그나마 괜찮아보였지만
우리말 녹음인데다 오후까지만 상영이었다.

그래서 대신 도서관에 가서 하루키의 소설을 빌린 뒤
근처 공원에 맥주와 깐호두를 사들고 가서
맥주를 마시며 소설을 읽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맥주는 카프리이지만, 병으로만 나와있다는 점이 항상 아쉬웠는데
동네 슈퍼에 가보니 캔맥주로도 출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역시 맥주는 캔으로 마시는 게 제맛이다. 특히
카아 하는 시원한 청량음과 함께 캔꼭지를 따는 것은 맥주를 마시는 과정에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절차인 것이다.

덥고 찐득한 날씨탓에 맥주의 김이 약간 빠진것 처럼 느껴졌지만 그정도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듬뿍 들이마신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와 가슴까지 도달하는 것을 느끼면서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읽었다.
호두는 반정도만 먹고서 남은 봉지를 가방에 넣어두고, 계속해서 책을 읽다 도중에 슈퍼에 들러서
크라비아라는 게맛살을 샀다. 천원밖에 안하는 데다 그냥 빨간 맛살과는 차원이 다른 부드럽고 쫄깃함에
완전 반해버렸다. 게다가 지방은 0%이고 단백질은 한 봉지당 무려 13%나 들어있다!
 
아무튼 맥주덕분에 약간 어질어질해진 머리와, 하늘에는 약간 구름이 낀 덕분에 따가울 정도로 극성을 부리던 햇빛이 주춤했던 오후. 비록 좀 후줄근하고 또 끈적이는 날씨였지만, 그 정도의 불쾌감은 늦은 오후의 캔맥주가 앗아가 주었다. 거기에 하루키의 소설이 가져다주는 여유롭고 아늑한 기분까지.

또다시 정신없이 바빠질 다음 나날들을 위해 충분한 재충전을 한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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