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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아, 20킬로그램의 삶

유연하고단단하게 2017. 6. 18. 13:48




am 09:15

마음 한구석에는 창고 같은 방이 있는 것 같다. 외로움, 상처, 우울, 걱정, 실수, 미움, 아픔 같은 것을 쌓아 올리는 곳. 무거운 것들을 채우다 보면 더는 아무것도 넣을 수 없는 때가 온다. 뜬금없이 눈물이 나거나,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인다면 비워낼 시간이 왔다는 신호다. 위로받고 싶지만, 그럴 땐 아무도 없다. 그 시간이 찾아오면 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공항에 간다. 집으로 돌아가다가 걸음을 옮겨 공항철도를 타거나, 새벽에 무작정 나와 공항버스를 타기도 한다. 공항에 간다고 하면 "여행가?", "누가 떠나?", "아, 누군가 돌아오는구나!"라는 얘기를 들을 것이 빤하므로 말을 아낀다. 말없이 노트와 펜 그리고 묵직한 마음을 들어 가방에 넣는다. 



pm 12:10

공항에 도착하면 주로 4층 파리바게뜨에 간다. 작년만 해도 이곳에는 다른 카페가 있었다. 그곳에 앉아 창밖을 보며 시간을 보냈는데 공사를 하더니 한옥 구조물이 들어섰다. 뭔가 보여주려는 노력은 알겠지만, 솔직히 멋지진 않다. 서까래 아래 'PARIS BAGUETTE'라는 글씨는 아무리 봐도 어색하다. 샌드위치와 커피로 요기하며 밖을 구경한다.

보딩브리지로 비행기와 공항을 연결하는 모습, 형광 조끼를 입고 뛰어다니는 사람, 천천히 움직이는 비행기...... 주변을 둘러보니 모두 아무 말 없이 유리 밖만 보고 있다. 다양한 나이와 국적의 사람들 틈에 열차에서 봤던 두 노인도 보인다. 말이 많던 할아버지도 이곳에선 조용하다.



pm 14:05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낸다. 심호흡하고 나를 슬프게 한 것을 적어내린다. '뜻대로 풀리지 않던 일, 오토바이에 묶여 달리고 있던 강아지, 형편없던 말, 동생에게 뱉은 쓸데없는 잔소리, 출근길에 합정역에서 마주치는 눈이 먼 남자, 의도와는 다르게 억울하게 꼬였던 사건, 엄마 그리고 아빠.' 이런 것을 쓰고 있으면 펜을 여러 번 내려놓아야 한다. 눈을 감기도 하고 밖을 보기도 하면서 꼼꼼히 슬픔을 되짚는다. 눈물이 날 만큼 슬픈 일도 있지만, '이런 일을 담아뒀나?' 하고 웃게 되는 일도 있다. 몇 번 펜을 들었다가 내리면 비어있던 종이에 빼곡히 글씨가 채워진다. 보통은 이렇게 적은 후, 버린다. 꼬깃꼬깃 구겨서 눈에 보이는 휴지통에 있는 힘껏 던진다. 공항에 다녀온 후, 다시 같은 슬픔과 마주하게 되더라도 '너는 이미 내가 버린 것'이라고 외면할 땐 거짓말처럼 편해지기도 한다.

오늘은 계획에 없던 일이 생겼다. 슬슬 일어나려고 기지개를 켜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두드린다. 내가 오기 전부터 뒷자리에 앉아있던 피부가 까만 남자다. 새카만 손가락으로 내 수첩을 짚으며 "What is this?"라고 묻는다. 잠시 고민하다가 "trash."라고 답한다. 남자는 큰 눈을 더 크게 뜬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니 미국에서 왔다기에 종이를 찢어 손에 쥐여준다. 미국에 도착하면 쓰레기통에 버려달라고 부탁하니 손뼉을 치며 웃는다. 



pm 20:35

다시 익숙한 동네, 매일 걷는 익숙한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한다. 비행기를 둘러싼 모습을 구경하고, 스쳐 지나가는 들뜬 사람을 자세히 보고, 내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는 하루. 공항에 다녀오면 하루 동안 어디 먼 곳에 다녀온 착각이 든다. 비록 착각일지라도 괜찮은 기분이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걷다 보면 언제나 집 앞에 도착해 있다. '오늘은 푹 잘 수 있겠지.' 그런 마음으로 현관문을 밀어본다.




박선아, <20킬로그램의 삶>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