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유연하고단단하게 2017. 6. 4. 13:36


보고 듣는 행위는 내가 우연히도 잡지 기자를 업으로 삼아서 영화에 집중하기 전까지 시각과 청각이 기능하는 사람이 살아있다면 하기 마련인 다분히 소극적인 활동이었다. 그러나 극장의 어둠 속에 앉아있는 동안이 내 삶에서 가장 감각이 활성화되고, 타인을 공정하게 판단하고자 노력하고, 세계의 아름다움과 추함을 낱낱이 실감하는 시간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지면서 사태는 역전됐다. 사물과 개인은 현실과 달리 프레임 안에서 하나 하나 뚜렷한 나머지 나를 최고의 감정적인 동시에 이성적인 상태로 밀어왔다. 말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가장 살아있다고, 잠시 더 나은 인간이 된다고 느꼈다.


어린 시절 나는 새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과거를 지우고 새롭게 태어나고 싶었는데, 영화는 내가 유일하게 아는 임사 체험이자 인생 체험을 제공했다. 바깥 세계와 나를 단절하고 어둠 속에 숨 죽이고 있으면 빛이 있으라,라는 신의 명령이 떨어진듯 영사실 창에서 백광이 쏟아지고 하나의 생애가 시작된다.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지만, 앞에 썼듯 딱히 나의 삶이 아닌 것도 아니다. 영화 한 편 안에도 무수한 삶과 죽음이 있다. 테이크는 지속되는 동안 현재진행형의 삶이며, 편집은 한 쇼트의 죽음이자 다음 쇼트의 탄생이다.

영화가 끝나 스크린이 암전되고 극장에 불이 켜지면, 나는 방금 본 영화를 친애하는 사자처럼 추억하며 몸을 일으켜 내 몫의 지루한 원테이크 영화, 그러니까 일상 속으로 황홀하게 비척이며 돌아온다.



김혜리,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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