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110909

유연하고단단하게 2011. 9. 9. 21:11



이번 여름은 유난히 습했다.
게다가 내가 자취하는 곳은 창문 한 개짜리 고시원 한 칸 방인지라
빨랫감을 오래 놔두면 종종 곰팡이가 피기도 한다는.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그만 점 같은 것들이
방 한쪽 구석이나 거울 뒤쪽 같은 데에서 발견되기 시작했다.
그냥 먼지이거나 밖에서 묻혀온 이물질인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 이것들이 움직이는 거였다. 헐.

그치만 바퀴벌레나 곱등이같이 징그러운 벌레도 아니고
하도 쪼끄만 놈들이라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지난주 금요일 대량 서식지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알고보니 방 문이 문제였다. 

처음 고시원에 살기 시작했을 땐 빨래를 한 뒤에 항상 옥상에다 널어 말렸는데
점점 옥상까지 올라가는 게 귀찮아져서
그냥 옷걸이에 빨랫감을 주렁주렁 널어서, 문고리에 매달아놓고 말리곤 했다.
그런데 그 젖은 빨랫감 뒤에 벌레들이 살기 시작한 거였다.
무심코 빨랫감을 들춘 뒤, 깜짝 놀라서 밑에 붙여놓았던 포스터를 떼보니까
그 안에 검은 벌레들이 우글우글.

정신을 붙잡고 얼른 휴지로 놈들을 다 닦아내고
인터넷에서 벌레의 정체를 찾아보았다. 
먼지다듬이. 일명 '책벌레'.
목재가구나 문 틈 같은 데 서식하며 습기 찬 곳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암수 구별이 없어서 한 마리만으로도 무한증식이 가능하다는 충격적인 사실. 
이런 열등한 생물체 따위가...

당장 인터넷으로 먼지다듬이 퇴치 스프레이를 주문하고
이틀 뒤인 지난 일요일, 텝스 시험을 보러 가기 전에 
책벌레가 대량 발견된 방문과 벽에 스프레이를 엄청 뿌려댔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텝스 시험을 치르고
시험 뒤풀이로 혼자 코엑스에 놀러가서 쇼핑까지 하고
돌아왔더니
두둥

환기가 잘 안 되는 고시원 자취방에 살충제 스프레이 냄새가 가득 차서
옷이고 이불이고 몽땅 냄새가 밴 데다
심지어 고시원 전체에 스프레이 냄새가 퍼진 것이었다.

급히 일단 근처 카페베네로 피신을 했다.

하지만 방에 들어가지 못하는 건 둘째 치더라도
고시원 전체에 정체 모를 냄새를 퍼뜨린 게 문제였다.
관리아저씨한테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전화 오진 않을까
옆 방 여자들이 쳐들어오진 않을까
두려움에 떨면서 그날은 결국 외박을 했다.



결론은
아무런 폭동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한테 책임을 묻는 이도 없었고 (아직은)
다만 이틀이 지난 지금도, 방에 들어가면 은은한 살충제 냄새가 나를 반기고 있다.

아무튼 실수를 통해서 배워나가는 거니까
고시원 같은 공간에서는 '함부로' 무슨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난 정말이지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단 걸 명심해야겠다.


며칠 뒤 다시 책벌레가 발견되어서
스프레이 살포는 그다지 성과가 없었던 것으로 판명됐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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