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홀바인, <대사들>, 1533
우리의 망막에 다가온 빛의 경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한 '사회적으로 합의된' 서술들에 따라 인지된다. 즉 내가 볼 때, 내가 보는 것은 단순히 빛이 아니라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이다.
인간의 시각은 사회화되어 있다.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문화적 구성물인 시각성을 위한 담론들의 총합으로서의 스크린이 서있다. 말하자면 망막과 세계 사이에는 기호들의 스크린, 즉 사회적인 활동의 장을 이루는 시각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로 구성된 스크린이 삽입되어 있다. 내가 사회적으로 보는 것을 배울 때, 즉 내가 나의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인식 코드들을 가지고 나의 망막의 경험을 규명할 때, 나는 (내가 보기 이전에 세계를 보았고 내가 더 이상 보지 않는 이후에도 여전히 보고 있을) 시각적 담론의 체계들 속에 편입된다.
인간의 시각은 사회화되어 있다. 주체와 세계 사이에는, 문화적 구성물인 시각성을 위한 담론들의 총합으로서의 스크린이 서있다. 말하자면 망막과 세계 사이에는 기호들의 스크린, 즉 사회적인 활동의 장을 이루는 시각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로 구성된 스크린이 삽입되어 있다. 내가 사회적으로 보는 것을 배울 때, 즉 내가 나의 사회적 환경으로부터 내게 주어진 인식 코드들을 가지고 나의 망막의 경험을 규명할 때, 나는 (내가 보기 이전에 세계를 보았고 내가 더 이상 보지 않는 이후에도 여전히 보고 있을) 시각적 담론의 체계들 속에 편입된다.
라캉은 홀바인의 그림을 예로 들고 있다. 대사들은 학문의 대가들로서, 과학과 예술을 포함한 모든 인식의 코드들-사회적 환경 속에서 형태지워진-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시각 장에는 그들이 지배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형태가 왜곡된 채로 그들의 공간을 가로질러 비스듬히 누워있는두개골이 끼어든다.
스크린 혹은 두개골의 삽입이 갖는 효과는, 보는 주체가 시각 경험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말을 하는 주체가 발화의 중심에 있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내가 말할 때, 나는 내가 언명하는 각 단어들을 나의 독특한 사고의 충만한 의미들로 채우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엄연한 사실은, 내가 말을 하는 사회적인 활동의 장에서는, 내가 언명하는 단어들은 이미 놓여 있던 궤도들 혹은 의미망들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보는 것은 나의 봄(seeing)에 앞서 이미 놓여있던 궤도들 혹은 의미망들에 의해 형성된다.
- 노먼브라이슨, '확장된 장에서의 응시, <시각과 시각성> 중에서
우리는 결국 '아는 대로(만)' 볼 수 있다, 당연한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회적으로 학습된 의미 체계'를 통해서만 대상은 우리에게 인지되고 파악될 수 있다
는 사실을 종종 간과된다. 나의 주체적 힘과 자유를 과신하면서.
의미 체계라는 건 우리가 무엇에 대해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야기하기 위해서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 선험적 체계라는 것 때문에 모든 인간은 언제나 실재를 (체계의 걸러냄 없이 온전하게) 그 자체로 인지할 수 없고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맥락은 다르지만 한가지 더, 어쨌든 각자가 '아는 만큼' 세상에서 건져올릴 수 있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느끼는 사람일수록 세상의 많은 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소중하게 가질 수 있는 거다.
그러니 나도 좀 더 부지런히 살아야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