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브리지파트너

유연하고단단하게 2010. 8. 13. 15:14

 


한정희 단편소설집
브리지파트너

 


소설을 '수다떠는 기분으로' 읽는 걸 좋아한다.
정말 그래, 라고 생각하면서.
내가 막연하게 느끼고 있던 것들이 완벽한 표현으로 서술되어 있는 것에 감탄하면서.


고등학교 때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처음 읽었던 뒤로
소통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그런 소소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취향이 되어 버렸는데
솔직히 말해서 하루키만큼 '묵직하고 완벽한 즐거움'을 경험하게 해준 작가는 지금까지 없었다.

 

며칠전 학교 도서관에서 별 기대없이 '브리지파트너'라는 소설을 집어들어 읽었다.
오랜만에 만난, 거의 완벽하게 마음에 드는 스타일의 이야기들이었다.

말투, 단어의 어감, 표현 하나하나가 마음속에 스며드는 기분이 들었던.

 

 

 

 

 

웃으면서 죽는 법 중에서

 

 그녀에게는 남다른 직관이 있었다. 그녀가 말을 하면 그것은 내 뼛속에서 튀어나와 말이 되는 은밀한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얼굴이 약간 얽었고 붉은 빛이 도는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다. 검정 터틀넥 스웨터와 하늘거리는 검정색 저지 롱스커트를 입고 반들반들한 생기 넘치는 얼굴에 자신감으로 꽉 찬 미소를 지으면서 큰 키를 휘청거리며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너무 당당했다. 희디흰 손가락 사이에 가늘고 긴 담배를 끼워 들고 노동 운동과 실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빛나는 미래를 포기하고 금속 공장 여공으로 취업한 '시몬 베이유'를 이야기할 때 그녀에게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금방 그녀의 추종자가 되었다. 그녀가 내뱉는 한마디의 말이나 한 줄의 이야기에도 얼마나 공감을 하고 함께 골똘히 그 문제에 사로잡혔던가. 다른 사람보다 그녀가 본질적으로 더 우수하고, 어떤 꺼지지 않는 불이 그녀의 내면에서 뿜어져 나와 그녀를 생기 있게 지켜 주는 듯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이미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런 영향력은 아주 사소한 것들에까지 미쳤다. 예를 들어 그녀가 맨발에 까만 운동화를 신고 나오면 나도 곧 까만 운동화를 사서 신었고, 그녀가 연필을 쓰면 나도 곧 만년필을 집어던지고 연필을 썼으며, 그녀가 사르트르의 『말』을 읽으면 나는 그날 저녁부터 집에서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 식으로 그녀를 따라하는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지만, 아마도 내가 가장 열성적이고 그녀가 미치는 영향력에 가장 자발적으로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내면적인 유배자가 되어 모든 것을 냉소적으로 보았다. 그녀는 그런 기미를 비치지 않았지만 아마도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해야 할 일들을 빈틈없이 해 나가면서도 사실을 자기 삶을 경멸하고 스스로 주변으로부터의 소외를 자초했다. 물론 겉으로 말썽을 피우거나 표면적으로 반항한 것은 아니었다. '유신 시대'라는 정치적 상황에 갇힌 갑갑함 속에서 들끓는 청춘과 억눌린 감정 때문에 내면적인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렇다고 사회적 상황의 탓으로 돌릴 만큼 영악하지 못했고, 현심 참여라는 적극적인 사회 운동에 가담하기에는 자신이 앓고 있는 고통을 청춘의 통과의례쯤이라고 여겼다.

 

 오랜만에 앉아 보는 5월의 대학가 밤거리는 싱그러웠다. 카페의 노상에 나와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차들과 오토바이의 질주를 보고 있자니까 삶도 죽음도 아득하게 생각되었다.
 "물론 인생이 죽을 만큼 힘이 들어서 자살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자신의 존재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서 죽고 싶다는 느낌응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네. 나는 내 존재가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만 같아서 죽고 싶었거든.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고 뭘 하고 싶은 의욕도 없는 내가 시체처럼 느껴져서 죽고 싶었어."

 

진실은 내가 그랬으면 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나는 갑자기 어둠 속으로 들어선 것같이 느껴졌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속에는 더 무시무시한 경우들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죽음보다도 삶을 택할 수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죽음이 전혀 무서운 대상이 아니게 되었을 때, 끝까지 살아 있음으로써 절망을 덤덤히 웃으면서 통과할 수 있게 되는 것 ……
 앞으로 삶의 변화가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가정에 빠지는 것만으로 자살을 꿈꾸었다면 그것은 내가 삶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나는 단지 죽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으며, 나의 이 고통은 윤회 속에 갇히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산수유 열매 중에서

 

 요즈음 세태라는 것이 자신 외에는 어떤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친한 친구가 갑자기 병에 걸려서 죽을 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슬픔을 표시하기에 앞서 호들갑스러울 정도로 놀란다. 요즈음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을 그처럼 놀라는 것으로 표현하는가? 한편으로 생각하면 웬만한 일에는 잘 놀라지도 않는 세태에서 그만큼 호들갑스러운 제스처를 보여준다는 것이 깊은 슬픔을 나타내는 하나의 표현 방식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해진다. 텔레비전의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한 개그맨들이 남의 불행은 곧 나의 행복이라고 부르짖는 말 속에서 오히려 세태를 풍자하는 날카로운 진실을 찾아낸 듯해 그녀의 가슴 한편이 쓸쓸해졌다.
 가까운 이웃의 돌연사는 자신의 건강을 부랴부랴 체크하고 주변의 안전과 자신의 행복을 재확인하는 계기일 뿐이다. 물론 가슴속에서는 사랑하는 친구를 갑자기 잃어버린 허망함이 스산한 바람 소리를 내며 스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장례식에도 가고, 영결식에도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도 잠깐이다. 사람들은 아주 빠르게 제 속도를 찾아 일상의 궤도 속으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자기만의 행복과 자기만의 아픔이 기다리고 있는 그 일상 속에 빨리 돌아가지 못하면 금방이라도 무슨 사건이 터져서 자신이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서 그토록 허둥지둥 서두르는 것 같다. 그녀는 입속으로 '갇혀 있는 일상'이라는 말을 천천히 뇌어 본다. 무슨 외국어라도 발음한 것처럼 아주 서툴게 들린다. 그러자 그녀의 마음속에서 아주 크고 우울한 무엇이 가슴을 짓누르는 게 느껴진다.

 

 


브리지 클럽 중에서


 아무도 없는 거실에서 홀로 서서 샤갈을 보고 있다. 나는 이 그림의 제목을 알지 못한다. 누워 있는지, 혹은 서 있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구도 속에 놓여 있는 연인과 빛의 무리 속에 떠 있는 천사와 양, 그리고 십자가, 숨은그림찾기에서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떠다니는 사람과 동물들……. 나는 아무리, 이 그림을 아무리 들여다보고 있어도 왜 좋은가를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이끌릴 뿐이다.
 이끌린다는 것만큼 잔혹한 일은 없다. 그것은 이끌리는 사람을 영원히 불구의 자세가 되게 한다. 어떤 곳으로 이끌린다는 것은 그곳을 천상으로, 여기 이곳을 지상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끌림은 상승의 본능이다. 이끌릴 때 우리는 맹목적인 생명이 아니라, 무한히 확장된 신비스러운 세계와의 합일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천상의 경험은 천상의 것일 뿐, 결코 지상의 것이 아니다.
 이토록 선명하게 보이는 한계가 왜 현실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것일까.
 나는 왜 샤갈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일까?
 나는 영원히 어딘가로 나를 끌어올리는 행위를 계속할 것인가.
 그렇지만 지상을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끌리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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