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안개

유연하고단단하게 2010. 7. 24. 00:54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덜컥 이런 말을 꺼내놓았다고 그녀는 걱정한다. 창밖엔 안개가 짙다.


내 어린 낙타는 벌써 잠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집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저녁. 살아 있는 집과 죽은 집, 불 켜진 집과 꺼진 집. 모든 집들이 모여 긴 오징어 다리를 달고 흐느적흐느적 헤엄치는 흰 물결 속에 잠이 들었다.
저만치 앞에서, 꿈틀대는 오징어 다리에 걸린 얼굴들이 움직인다. 낯익은 젖은 얼굴들. 비에 젖은 낙엽처럼 오징어 다리에 붙어 길바닥을 훑는다. 서늘하고 축축한 기운이 몰려온다. 황혼에 약한 내 어린 낙타는 잠들어버렸다.
더 가까이, 익숙한 집들이 몰려와 앞을 막는다. 내가 살던 집과 태어나던 집과…… 혼자 웃던 집과 불태운 집, 몰래 숨긴 집과…… 함께 떠들던 집과 함께 떠난 집…… 함께 구멍을 뚫던 집…… 들이 다 한곳으로 몰려와 앞을 막는다.
수많은 오징어들이 충돌한다. 잠든 내 낙타를 들이박는다. 몰려드는 집들, 젖은 얼굴들.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놓았던, 이미 사라진 내 옛집도 달려나온 길 위에 굽이치는 흰 물결. 황혼에 약한 내 어린 낙타는 오래전에 잠들고 밤이, 흰 물결 속에서 밤이,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내 낙타를 닮은, 죽은 내 낙타를 닮은 젖을 얼굴 하나가 황혼을 품에 안고 뒤돌아,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보인다.


"인생에 빠지지 마세요." 덜컥 이런 말을 꺼내놓으며 그녀는 걱정한다. 창밖엔 늘 안개가 짙다.

 

_ 박상순, 안개

 

 

꿈을 꾸는 기분으로, 그러나 조금 더 쓸쓸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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