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신림2동 네시 십팔분

유연하고단단하게 2010. 7. 27. 04:50

 

핸드폰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새벽 네시 십팔분.
숫자조차 을씨년스럽다

한밤중에 잠에서 깼다.
열대야에 가뜩이나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밖에서 왠 여자 울음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아주 절절하게, 마음 속 깊은 데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처절한 울음소리

멍한 상태에서 부시시 몸을 일으켜 앉으니까 곧
그 울음소리에 반응해 내 몸 세포 구석구석의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흑, 흑하는 여자의 호흡에 내 숨까지 턱턱 막히고, 온 몸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처음에는 맞은편 고시원에서 사는 사람이 방 안에서 울고 있는줄 알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끔찍한 생각은 어떤 '죽음', 자살.
어느 고시원에서 누가 자살한지 며칠만에 발견되었더라, 하는 뉴스에서만 보던 이야기.
새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가 얼마나 끔찍한 곳인가를 생각했다.
'고시'라는 작고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24시간 7일, 1년 365일을
스탠드 하나 외로이 켜 놓은 책상 앞에 앉아 살아내는 수많은 사람들.

여자의 울음소리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고
나는 여자의 사정에 대한 궁금함과 그녀에 대한 연민,
동시에 새벽에 잠을 깨운 것에 대한 짜증이 반반정도 섞인 감정으로 방 밖으로 나왔다.
내 방 맞은 편에 사는 사람이 이미 나와서, 신발장의 창문 밖으로 시선을 두고 서있었다.
그제서야 비로소 여자 울음소리가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는 것임을 알았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남자들이 빙 둘러 서있고,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열쇠와 핸드폰을 챙겨서 밖으로 나갔다.
우리 고시원 옆의 원룸 건물 현관에 그 우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그녀를 멀찌거니 두고 둥그렇게 서있던 남자들은, 알고보니 가해자가 아니라
나처럼 울음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온 사람들, 그리고 무언가를 '목격'한 듯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경찰에게 신고를 했으니 기다려 보자느니
어떤 노란 카라티를 입은 남자가 언덕을 뛰어올라가는 것을 보았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경찰차가 도착하고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못한 그녀가
몸을 일으켜, 경찰차에 탄 채로 사라질 때까지
못에 막힌 듯이 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안타까움과 소름,
여자에 대한 동정, '가해자'에 대한 분노,
불조차 켜지 않은채 방에서 가만히 여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을 이기적 '다수'의 끔찍함

 

여자의 울음 소리가 유령처럼, 아직도 고시촌을 맴도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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