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느렸다. 굉장히 느렸다. 평범한 사람의 걸음보다 적어도 다섯 배는 느렸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느리게 걸어도 엄마보다 한참 앞서갔다. 거기다 태국의 보도는 성인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엔 턱없이 좁았고, 보도블록이 깨진 곳도 심심찮게 있었다. 엄마는 조금이라도 울퉁불퉁한 길을 만나면 중심을 잃고 휘청이기 일쑤였다. 지갑이며 마스크며 핸드폰 같은 걸 두고 와서 기껏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일도 잦았다. 나는 위험한 것을 발견할 때마다 뒤를 돌아 길을 조심하라고 알려주었다. 앞서서 길을 찾으며 그 어려운 걸음으로 가는 길이 헛걸음이 되지 않도록 확인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보다 앞서 걸었고 때로는 한참 멀어진 지점에 서서 엄마가 오기를 기다렸다. 정말 답답한 일이었지만, 묵묵히 그녀가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엄마가 버럭 화를 냈다. 왜 자신과 발맞춰 걷지 않냐며 실성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한번 시작된 화는 어둠을 따라 깊어졌다. 나는 어떻게 모든 걸 완벽히 맞출 수 있냐고 맞받아쳤다.
우리의 싸움은 때로 끝없이 이어지곤 했다. 엄마가 아닌 누군가와 그렇게 싸워본 적이 없다. 그렇게 끝까지 가는 일은 없었다. 다행인 일이었고 아찔한 일이었다. 모든 모녀가 이렇게 싸우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충격이었다. 엄마와 나는 싸움으로 시작되고 끝났다. 깊은 애정은 그만큼 짙은 무지를 드리웠다. 우리는 각자의 그림자에 대해 함부로 넘겨짚었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아무렇게나 말했다. 이상하게도 엄마에게 소리치면 소리칠수록 나는 나와 남게 되었다. 나조차도 나와 머물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이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싸움의 불씨가 꺼져갈 즈음, 창문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것이 보였다.
재처럼 타버린 황량한 마음으로 도착한 곳은 평화로운 곳이었다.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자리한 비밀스럽고 조용한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엔 당장 뛰어들고 싶은 아담한 수영장이 있었고 하얀 벽과 나무로 지어진 정갈한 숙소가 있었다. 커다란 나무들이 곳곳에 그늘을 드리웠고 배부른 고양이가 한가로이 지나다녔다. 종일 새가 우는 소리만 들렸다. 엄마와 나는 그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고요해졌다.
낮이면 수영을 하고, 선베드에서 책을 읽었다. 근처 재래시장에 들러 식재료를 사다 요리를 했고, 배가 부르면 낮잠을 잤다. 밤이 되면 별을 올려다보았고, 욕조에 물을 받아 긴 목욕을 했다. 밤에 문을 살짝 열어두면 고양이가 침실로 찾아와주었다. 그 보드라운 털을 쓰다듬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는 동안 엄마가 옆에 있는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다. 엄마가 나에게 산책을 하겠느냐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양다솔, <아무튼, 친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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